[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우리의 호흡법•소리내기•말하기 등: 배우훈련법 찾아세우기 작업 2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우리의 호흡법•소리내기•말하기 등: 배우훈련법 찾아세우기 작업 2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2.04.1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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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하, 김소희 그리고 성창순선생님
우리소리 힘과 아름다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청명과 한식이 지난 오늘날, 봄은 바야흐로 대지의 속살까지 스며들어 산과 들에는 진달래, 개나리, 목련으로 봄맞이를 완성하고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우리 집에서 매주 화요일 ‘몸다스리기’를 시작하여 발성의 원리를 배워 체계화하고자 한 나의 계획은 다행히도 김월하, 김소희 두 선생님의 참여로 화려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화요일 11시에 청운동 우리 집 거실에서 1시간에 가까운 몸다스리기 운동을 통하여 우리 몸의 호흡이 어떻게 소리의 터전을 마련하는가를 살피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요가를 틈틈이 익힌 나는 그 몸동작이 무리 없이 소리의 원활한 열림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터득하였다.

4,50분 동안 몸동작을 충분히 하고 난 다음 우리는 배고픔을 느끼고 식사 시간을 쉬는 시간으로 한담을 즐겼다. 선생님들의 지나온 세월의 얘기를 들으며 차정이 좋은 마당 앞에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선생님들의 유년 시절 어떻게 소리의 세계로 안내되었는지를 듣는 귀한 시간이 이어졌다.

열린 마음으로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하기 좋아하시는 김월하 선생님과 듣는 것을 좋아하시는 듯 속 얘기를 아끼시는 김소희 선생님과는 매우 대조적이셨다. 아마도 그전부터 건강에 적신호를 받고 불안하셨던 상황이 그렇게 침묵을 지키게 하셨는 듯하기도 했다. 두 번째 주에 벌써 병환으로 입원을 하셔야겠다는 전갈을 받으며 그 역사적인 두 대가들의 의미 있는 수업은 아쉽게도 끝나고 김월하 선생님 단독 수업으로 이어졌다. 그게 계기가 되어 나의 실험적 전통의 소리 내기 수업은 김월하 선생님의 소리내기 방법을 바탕으로 마포에 자리 잡은 ‘김월하 연습실’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배우수업 <소리내기> 바탕은 이러한 모습으로 당시 떠오르는 배우였던 최종원 씨도, 서울대 독문과 후배이며 독일 유학을 하고 온 박찬빈 선생도 때때로 함께하며 그때나 이때나 답답하게 펼쳐지는 연극계의 현실과 문화 풍토에 대한 개선점을 토로하며 나름대로 각기 그에 대한 의견들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답답한 심정을 토론으로 끝내지 말고 무슨 방법을 찾아보자고 논의한 끝에 문화행정에 너무 좌우되는 문화 풍토를 바꾼다는 일은 우리들로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문화 패턴 찾기에 힘을 모아보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론의 장을 확장하기 위하여 나는 당시 연극계의 중심에 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손진책 김아라 등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공연 속에 활발하게 펼쳐가는 세대를 더 바쁘게 한다는 것은 오히려 효과적이지 않을 듯하여, 그다음 세대인 당시 40대의 이병훈, 윤광진, 김명곤 연출 등 우리 것에 관심을 가질만한 다음 세대를 공략하여 연구모임을 꾸며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 연구모임을 함께 만들자고 모임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우선 우리 집에서 김월하 선생님과 진행하는 자리에 초대를 하고 그들의 지식과 안목을 모아 함께 작업을 펼쳐 나가볼까 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과 연구열은 생각보다 한 두 번의 토론을 거치고 나면 더 진전되는 게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토론의 자료를 수집 기록하기 위하고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 이어준다는 생각으로 당시 이화여대 국문과 김호순 교수 밑에서 판소리분야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백현미 학생을 조교로 하여 진행하였다. 당시 이 작업의 조교로 참여, 수고해준 백현미 박사는 후에 전통분야 평론 활동을 하며 주로 국립극단 창극 분야의 단골 평론가로 평론을 펼치며 , 후에는 어느 지방대학의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바쁜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한극>의 중추가 될 수 있었던, 그리고 그것을 함께 풀어길 수 있겠다고 기대한 나의 생각은 세대를 이어가며 함께 작업을 해나가기에는 우리나라 당시 공연예술계나 이 분야의 학계가 너무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파악하지 못한 나의 불찰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다. 나의 실험적 생각의 구도가 명쾌하게 세워지지 못하였던 데도 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함께 생각을 나누며 새로운 학문분야를 대하는 우리나라 학계의 풍토가 아직 칸막이 구조를 탈피하지 못한 상황에도 기인하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더 큰 원인은 이 작업은 반드시 공연이라는 값비싼 실천을 통해서만이 입증된다는 복합적 구조의 실험적 실천을 거쳐야만 아주 더딘 걸음의 발전분야라는 생각을 굳혀본다.

나의 이러한 발상은 사실 동구 유럽에 자리하고 있는 헝가리의 <코다이> 음악센터와 <코다이 음악연구소>를 모범 삼아 우리 전통문화, 특히 소리와 춤을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며 키우기로 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후대에 체계 있는 교육을 근간으로 하여 공연예술의 무한한 현대화의 가지를 뻗어갈 수 있다는 착상에서 였다. 겁 없이 큰 그림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 나의 생각이 욕심이었나 하는 후회도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러한 작엽은 언제 했어도 해야 했던 백번 잘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