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예기 진향과 성북동 길상사
[성기숙의 문화읽기]예기 진향과 성북동 길상사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4.1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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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이 있다. 도시 사찰 길상사엔 특별한 내력이 전한다. 조선권번의 빼어난 예기로 이름난 김진향(金眞香)과 얽힌 이야기다. 길상사의 전신은 대원각이다. 대원각은 제3공화국 시절 삼청각, 선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요정의 하나로, 이른바 요정정치의 본산으로 명성이 있었다. 진향은 자신이 소유했던 싯가 1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무소유’의 대명사 법정스님께 헌납하여 세간의 화제가 됐다. 대원각은 1997년 법정스님에 의해 사찰로 탈바꿈하여 새롭게 세상에 선봬었다. 

대원각에서 길상사로의 변신이 주목받은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예기 진향과 시인 백석(1912~1996)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의 백석은 근대 모더니즘 시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회자된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유학파에 속한다. 함흥 영생여고 교사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그는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또 서구적 외모에 남다른 패션감각을 지녀 근대 ‘모던 보이’로도 불렸다. 

시인 백석은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시집 『사슴』을 비롯 ‘모닥불’, ‘북관’, ‘미명계’(未明界), ‘산숙’(山宿),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이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랜 세월 베일에 쌓여 있었다. 사실 백석은 1980년대 후반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는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금기의 인물이었다. 바로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백석은 월북이 아닌, 재북 문인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월북이란 북한의 사회주의 체체를 선택하여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백석은 일제강점기 봉건적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만주로 향했고, 해방 후에는 안태고향인 북한땅으로 귀향했다. 부르주아적 잔재로 낙인찍혀 평양 문단에서 쫓겨나 자강도에서 노동자로 남루하게 살다가 1996년 쓸쓸히 여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산문집 『내사랑 백석』(1999)에서 백석이 월북이 아닌, 재북 시인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야의 본래 이름은 김영한(1916~1999)이다. 그는 1916년 서울 종로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나름 부유층에 속했으나 부친이 작고한 후 금광을 쫓던 친척에 속아 알거지 신세로 전락한다. 궁핍해진 집안사정은 공부하고 싶은 소녀의 간절한 소망을 단번에 앗아갔다.  

16세에 조선권번에 입소한 진향은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정재 등을 배웠다. 하규일은 전통가악인 가곡, 가사, 시조, 정재 등의 보존 전승에 힘쓴 근대 국악계의 선구자다. 관계(官界)로 진출하여 한성소윤, 진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이왕직아악부 촉탁을 지냈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엔 정악전습소 학감에 취임하여 국악의 전수와 보급에 앞장섰다. 

학식과 기예에 두루 능통했던 진향은 조선권번을 대표하는 이른바 엘리트기생으로 통했다. 주지하듯, 권번은 근대 전통예능교육의 산실로 통한다. 시·서·화는 물론 가무악을 교습하고 공연활동을 관장했다. 하규일, 이병선 등이 가곡과 가사, 시조, 정재를 가르쳤고 충남 홍성 출신 명무 한성준은 주로 민속춤을 지도했다. 

진향은 조선시대 왕궁문화의 꽃으로 불린 궁중정재 ‘춘앵전’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진향의 ‘춘앵전’을 추는 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 전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관광엽서에 춘앵전 모델로 나선 것이다. 그만큼 가무에 출중했음을 말해준다. 

빛바랜 사진 속엔 정재의 기본동작인 ‘이수고저’ 몸짓이 포착된다. 곡진한 자세가 돋보인다. 단아하고 아정한 몸짓에서 ‘춘앵전’ 고유의 미감이 전해진다. 이는 조선왕조 멸망 이후 여령정재(女伶呈才)의 전승을 파악할 수 있는 진귀한 자료로서 희소적 가치가 높다. 수려한 외모에 영특했던 진향은 스승인 금하 하규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금하는 그에게 ‘진향’이라는 기명(妓名)을 지어줄 정도로 각별히 총애했다.  

한편, 진향은 파인 김동환이 발간한 문학잡지 「삼천리」에 두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만큼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다. 진향의 내면에 깃든 문학적 소양은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키우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된다. 1936년 진향은 함흥권번에서 백석과 첫 인연을 맺고 운명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 무렵 일본 유학중이던 진향은 자신을 후원한 조선어학회 회원 신윤국 선생이 일제에 의해 함흥권번에 투옥되어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학업을 중단한 채 함흥으로 향했다. 지역의 유력인사를 통해 스승을 면회할 기회를 갖기 위해 함흥권번에 잠시 발을 내딛었다. 끝내 스승 신윤국은 면회하지 못했고, 대신 함흥관 연회에서 시인 백석과 조우하게 된다. 당시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재직중이었다.   

진향을 일컫는 또다른 이름 ‘자야’(子夜)는 함흥시절에 백석이 지어준 이름이다. 중국 당나라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의 시에 나오는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자야’라는 이름이 탄생했다는 내력이 전한다. 자야는 둘 만이 공유한 비밀스런 이름으로 긴 세월 진향의 품속에 머물러 있었다.

자야라는 이름은, 일평생 시인 백석을 발굴하고 탐구한 문학평론가 이동순에 의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에 이동순이 펴낸 『백석시전집』은 시인 백석 연구의 신호탄을 쌓아 올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 시인에 대한 이동순의 집요하고 끈질긴 탐구의 자세는 장르를 초월하여 좋은 귀감이 된다.

시인 안도현이 쓴 『백석평전』(2014)도 주목된다.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씨줄과 날줄의 파노라마는 사유의 깊이와 확장을 견인한다. 다양한 자료발굴과 분석 그리고 시인다운 직관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시인 백석의 삶과 예술을 복원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도 자야가 언급되는데,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 시각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퍽 인상적이다. 

한편, 국악학자 한명희는 자야(진향)가 근대 가곡인 거장 하규일의 여창가곡의 맥을 이어온 직계임을 학계에 알렸다. 어떤 측면 자야는 백석과 더불어 그 존재론적 의의가 배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 여러 학자, 평론가의 관심과 조력에 의한 자야의 세상 밖 화려한 외출은 세간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백석과 자야의 삶과 예술에 투영된 ‘근대’, ‘근대성’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문학사, 국악사, 무용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귀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예기 진향은 이름이 여럿이다. 세속에서 불린 본명 ‘김영한’을 비롯 기명인 ‘김진향’ 그리고 오직 연인 백석과 두 사람만이 공유했던 비빌스런 이름 ‘자야’가 있다. 생애 마지막엔 ‘길상화’(吉祥華)로도 불렸다. 길상화는 법정스님이 지어준 법명(法名)이다. 성북동 길상사엔 진향을 기리는 사당과 길상화 공덕비가 있어 방문객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천재 시인 백석 그리고 조선권번의 빼어난 예기 진향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다양한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일찍이 TV다큐멘터리로 다뤄졌고, 라디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동명의 소설도 나왔다. 공연예술계도 가세하여 뮤지컬 무대에도 올랐다. 

무용작품도 있었다. 안무가 박시종이 청주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동명의 시를 몸짓언어로 형상화하여 주목받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시인 백석과 예기 자야, 두 연인의 불타는 사랑을 드라마틱한 서사로 풀어낸 수작으로 기억된다. 박시종이 안무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몸으로 쓰는 한 편의 시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웅앙웅앙 울을 것이다/

길상사 낙성법요식 때 한 기자의 물음에 진향이 내놓은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천 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시주했는데,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 “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꺼야”. 예기 진향은 소천한지 오래지만 그가 남긴 말의 울림은 ‘오늘·여기’ 여전히 귓가를 멤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