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드라마 파친코, 거기서 국악을 만나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드라마 파친코, 거기서 국악을 만나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04.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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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뱃노래, 그 여자의 갈까부다.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조상님들 모셔가 한(恨) 좀 풀어 주이소. 대를 잇게 해 주이소.” 1915년 일제강점기의 부산. 영진(정인지)은 산골 무당을 찾아간다. 박복함이 대물림된 그녀는, 남편 훈이(이대호)를 위해서 굿당을 찾았다. 아이가 생기길 바라며 굿해주길 청한다. 굿이라고 해야 늙은 무당과 어린 소녀 딱 두 사람이다. 늙은 무당은 말한다. “아가 생길기다. 야는 살려 주실기다.” 

드라마 ‘파친코’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다른 드라마와 매우 다르다. 첫 장면부터 1915년 부산과 1989년 뉴욕이 교차편집되며 전개한다. 재미작가 이민진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한국에 뿌리를 둔 디아스포라의 얘기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국적 있는 것만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말이 과연 맞을까? 또 이 드라마에 적용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글로컬리즘(glocalism)이 저변에 흐르면서 글로벌과 로컬의 장면이 서로 밀당(교차)하면서 전개되는 건 분명하다. 지구촌의 모든 디아스포라가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데, 그건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자이니치) 이민사에 충실했다는 점이 아이러니!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건, 언제나 통한다는 걸 말해준다. 

내 직업이 직업인지라, 드라마의 음악에 귀 기울인다. 배경음악으로 특별한 게 없다. 그게 맞을 것 같다. 소설의 스토리가 워낙 강렬하고 배우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야 하니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그야말로 배경음악이 아닐까? 오히려 지역성과 민족성을 의식해서 삽입한 음악이 불편하다. 거기엔 서구인의 ‘피상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에 그렇다. 

“갈매기로 벗을 삼고 싸워만 가누나” 파친코의 첫 화에서 ‘뱃노래’가 등장했다. 주인공 선자네는 부산 영도에서 하숙을 친다. 거기서 남정네들이 막걸리를 하면서 노래 부른다. 일제의 압정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기에, 곡조와 기사가 딱이다.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싸워야 할 대상은 무얼까? 그가 잡은 괴기(고기)를 헐값에 후려치려는 일제의 횡포는 아니었을까? 그 노래를 불렀던 그 사람은 얼마 지나 잡혀 온다. 포승줄에 묶인 그 남자가 어린 선자를 보자 ‘뱃노래’를 부른다. 일본 순사의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에야노 야노야 에야노 야노야” 그는 이렇게 부른다. 그 시절의 가사로는 이게 맞다. 1970년대까지 우리도 그렇게 불렀다. 이런 후렴구는 일본식이다. ‘어기야 디어차 에야디야’가 우리의 후렴구다. 우리가 부르는 또 다른 뱃노래가 있는데, 거기선 ‘에야디야 어기야디야’라는 후렴구! 노래의 후렴구마저 일본에게 빼앗겼었는지 모른다. 

‘파친코’를 보면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소리를 들었는가? 일곱 살 선자는 물질이 좋다면서, 바다에 들어가서 큼직한 전복을 따온다. 선자의 아버지는 뭍에서 함께 숨을 참아본다. 뭍에서 참을 만큼 참았다가 숨을 쉰다. 이런 장면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이게 ‘숨비소리’로,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해녀가 물 밖으로 나오면서 짧고 굵게 내뿜는 소리다. 

“오늘 저녁 공연 땐 우리 모두를 위해서 부를게요.” 파친코 4화에선, 일본으로 향하는 덕수환(德壽丸)이란 배의 장면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마치 윤심덕 (1897 ~ 1926)을 연상케 하는 조선인 가수가 등장한다. 그녀의 신상에 대한 언급은 안 한다. ‘울게 하소서’(헨델)를 부르다가 멈추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갈까부다 갈까부네. 임을 따라서 갈까부다” ‘춘향가’의 한 대목이다. 몽룡을 따르고 싶은 춘향의 심정이 담겼다. 오래전 영화 서편제(1993년)가 ‘한’의 영화라면, 이 작품은 ‘정’의 드라마로 받아들여진다. 노년의 선자(윤여정)를 보면 더 그렇다. 마음 심(心)을 똑같다는 점에선, 한(恨)과 정(情)은 같다. 한을 고착적이라면, 정은 그렇지 않다. 정에 있는 푸른 청(靑)이 있는데, 이건 고요하다는 뜻과 통한다. 

선자의 삶이 곧 그렇지 않은가? 정이란 게 바로 그렇다. 상대(대상)에 달라붙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굳지 않는 속성이 정이다. 한수(이민호)에게도, 이삭(이상현)에게도. 선자가 딱 그렇다. 글로컬리즘(glocalism)을 지향하는 세상에서, 한국인의 근원적 심성에 뿌리를 둔 ‘정’의 정서는 지금의 지구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