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 제20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관람기②-텃밭킬러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 제20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관람기②-텃밭킬러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4.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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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있는 부조리극, 생기발랄한 음악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 객원기자, 한국 PD연합회 정책위원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부조리극이었다. 아내가 떠난 뒤 술에 쩔어 지내는 진로, 결혼할 꿈에 전전긍긍하는 큰아들 청년, 포경수술 받는 게 소원인 작은 아들 수음, 그리고 텃밭에서 과일과 채소를 캐 와서 이들을 먹여 살리는 93살 할머니 골륨. ‘뜯어 먹고 뜯어 먹히는 관계’에서 탈출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전쟁을 기다리는 막장 인생, 포경수술을 받을 희망도 없고, 금니를 차지하려는 골륨과 자식들의 갈등도 해결될 전망이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연출자 홍민정의 말대로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재기발랄한 대사 때문에 마냥 어둡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음악이 훌륭해서 감상하는 내내 즐거웠다. 

연출과 무대 미술은 수준급이었다. 전쟁과 장마가 오버랩되며 드라마의 줄기를 이루고, 폭우와 함께 파국이 오도록 한 설정은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빗소리와 일기예보 효과음은 연극적 재미를 더했다. 빨간 구두와 ‘누수페이스’ 등 위트있는 슬라이드도 좋았다. 무대 상단까지 소극장을 알뜰하게 활용한 연출이 만족감을 주었다. 굳이 옥의 티를 찾자면, 청년과 아가씨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나온 빨간 천이 너무 커서 위태로워 보였고, 거울이 달린 박스는 너무 작아서 이렇다 할 효과를 얻지 못했다.

대본은 이 시대의 모순과 아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진로는 아내와 함께 메추리를 먹으러 갔을 때의 추억을 노래했는데, 두 사람의 결별을 메추리 뜯어 먹던 상황에 빗대서 표현한 게 기발했다. 아가씨가 전전한 치킨집을 노래하는 대목도 우리 이웃의 삶의 조건을 절창으로 묘사하여 공감을 일으켰다. “학교 갈 때 등산복을 입어야 한다, 왜냐? 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으니”는 흐름상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었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식을 갑자기 얘기했기 때문에 의외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왜 골륨이 끝까지 금니를 자식들에게 안 주려 하는지 잘 드러나지 않은 건 다소 아쉬웠다. 이 점을 납득해야 관객들이 드라마에 100%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텃밭킬러’ 커튼콜 (사진=이채훈 제공)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텃밭킬러’ 커튼콜 (사진=이채훈 제공)

오페라는 역시 음악이다. 안효영의 음악은 소극장 오페라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들려주었다. 20세기 어법을 구사했지만 민요풍의 선율을 적절히 녹여내어 쉽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피아노와 마림바, 클라리넷과 호른의 대화가 다양한 음색의 팔레트를 펼쳐 보였고, 리듬과 다이내믹의 섬세한 변화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진로가 전쟁을 얘기할 때 펼쳐진 드럼의 행진곡 리듬, 그리고 3박자와 6/8박자로 된 춤곡풍의 노래들은 무척 흥겨웠다. 작곡가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다”고 밝혔는데, 청중 입장에서 음악을 한번 듣고 각 등장인물의 특징을 즉시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93살 할머니 골륨의 노래는 에너지와 생명력이 가득해서 역설적이었는데, 이 부분이 음악적으로 가장 훌륭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해 말 대학로에서 올려진 <장총>의 음악도 좋았지만, <텃밭킬러>는 그보다 좀 더 안정된 느낌이었다. 

김향은, 최병혁, 김지민, 김은경, 김비존 등 출연 성악가들은 열정을 다해 연기하고 노래했다. 20세기 어법으로 된 어려운 노래들을 자연스레 소화해 낸 것은 남다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며, 남은 공연에서도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 바란다. 오케스트라는 소규모 앙상블이므로 모든 연주자들이 솔로이스트인 셈이다. 한명 한명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게 객석에서도 느껴졌다. 파곳, 바이올린, 콘트라바스 소리가 상대적으로 작게 들려서 음향 밸런스가 미흡했던 건 개선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텃밭킬러’ 공연에 이어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현장 (사진=이채훈 제공)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텃밭킬러’ 공연에 이어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현장 (사진=이채훈 제공)

등장인물의 이름 - 진로, 수음, 골륨 - 은 다소 조악해 보인다. 좀 더 맵시 있는 이름이 가능하지 않을까? 제목 ‘텃밭킬러’도 쏙 들어오지 않는다. ‘텃밭’ 같은 어머니 덕분에 생명을 부지한 자식들이 금니를 탐내다가 끝내 어머니의 목숨마저 빼앗아 가는 비극적 상황을 함축한 제목으로 보이지만, 아직 이 작품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좀 더 기억하기 쉬운 제목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2019년 초연된 작품을 뒤늦게 본 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더 많이 공연되길 바라며, 언젠가 유럽 무대에서도 갈채를 받을 수 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