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누오바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누오바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2.05.0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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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과 연출력 돋보인 베리스모 오페라 대표작
서민들 현실적 삶 그려낸 19세기 사실주의 오페라 진수 맛보게 해
제13회 대한민국오페라축제 참가작

제13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이 4월 28일 갈라 콘서트에 이어 4월 29일 베르스모 오페라의 대표작 <팔리아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을 나란히 공연하며 화려한 막을 올렸다. 

두 작품은 태어날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골 기사’란 뜻으로, 밀라노 오페라의 단막 오페라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73편의 응모작 중 3편을 뽑았는데, 무명 작곡가 마스카니는 마감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착수하여 가까스로 입상했다. 이 오페라는 1890년 4월 9일 초연된 뒤 전 유럽에서 공연되며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역시 무명 작곡가였던 레오카발로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성공을 목격하며 자기도 이 정도 작품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자기 집의 하인이 살해당한 끔직한 실화의 기억을 되살려 ‘광대들’이란 뜻의 <팔리아치>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1892년 5월 21일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됐고, 이듬해 영국과 미국에서 공연되어 레온카발로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두 작품은 복수와 치정살인이 특징인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나란히 기록됐고, 1893년부터 이른바 ‘카브-파그’(Cav-Pag) 연작으로 같은 날 공연되기 시작했다. 

오페라 '팔리아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커튼콜의 한 장면.

누오바오페라단이 쌍둥이 같은 두 작품을 한 날에 공연한 것은 베리스모 오페라의 역사를 관객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한 흥미로운 시도였다. 화려한 귀족과 상류계층의 삶이 아닌 서민들의 현실적인 삶을 그려낸 19세기 사실주의 오페라의 진수를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과 완성도 높은 연출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팔리아치>가 먼저 막을 올렸다. 유랑극단의 여성 넷다를 중심으로 치정의 전운이 감돈다. 그녀는 남편 카니오의 과도한 구속에 시달리다가 옛 연인 실비오를 만나는데, 그와 밀회하는 장면이 토니오에게 발각된다. 평소 넷다를 흠모해 온 토니오는 그녀에게 거절당하자 복수심에 차서 카니오에게 아내의 부정을 알린다. 카니오는 넷다를 추궁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는다. 유랑극단의 공연 내용은 실제 현실과 무섭도록 비슷하다. 카니오는 공연 중 이성을 잃고 넷다를 찔러 죽인다. 극중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카니오는 뒤늦게 나타난 실비오마저 죽여 버린다. 객석은 아비규환이 되고, 무대에 오른 토니오는 “이것으로 연극은 끝났다”고 밝힌다. 

시골 성당의 평화로운 저녁 풍경과 치정 살인의 불길한 예감이 대조되도록 분위기를 잘 부각시킨 연출이 훌륭했다. 어린이 합창단의 생기있는 율동과 연기가 즐거움을 더했다. 극중 극에 몰입하는 군중들의 표정과 반응도 실감나게 표현했다. 주인공 카니오 역의 테너 이승묵이 부른 ‘의상을 입어라’는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그는 준수한 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종일관 열연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청중을 압도하는 드라마틱 테너의 경지에는 다소 못 미친 듯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극중 토니오는 바보지만 자기 이해관계가 걸리면 약삭빠른 간교를 발휘할 줄도 아는 인물인데, 바리톤 장성일은 쉽지 않은 이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 넷다 역의 소프라노 자원, 실비오 역의 바리톤 김은수도 조화롭게 음악을 이끌었다. 리릭 테너 김지훈이 부른 뻬뻬의 세레나데는 아름다웠다. 그가 객석 2층 박스에서 노래하도록 하여 입체감을 준 연출이 효과적이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투리두와 롤라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투리두가 군대에 간 사이 롤라는 돈 많은 마부 알피오와 결혼했다. 제대 후 돌아온 투리두는 깊은 절망에 빠지고, 자신을 곁에서 위로해 준 산투차와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옛 애인 롤라를 다시 만나게 된 투리두는 산투차를 매몰차게 배신한다. 산투차는 알피오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고, 알피오는 투리두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투리두가 죽었다”라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어머니 루치아와 산투차는 비탄 속에 쓰러진다.  

영화 <대부 3>의 대단원에 나와서 눈물을 자아낸 ‘간주곡’은 이 날 깊은 감동을 주었다. 오케스트라가 깊은 명상에 잠긴 듯 이 곡을 연주할 때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위한 기도가 자막으로 흐른 대목은 관객들을 숙연케 했다. 산투차 역의 소프라노 박명숙, 롤라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규영, 투리두 역의 테너 이정원, 알피오 역의 바리톤 유동직, 루치아 역의 알토 박라현 등 주요 출연자들의 기량은 훌륭했다. 노래를 잘 하면 훨씬 더 깊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날 출연한 성악가들이 입증해 주었다. 

그날 공연을 함께 관람한 분은 오페라를 생전 처음 본다고 했다. 그는 “<팔리아치> 살인 장면을 영화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며 연출을 칭찬했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두 여주인공이 노래를 너무 잘 한다”며 기뻐했다. 그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게 제일 높은 점수를 주었다. “무대 밑에 들어가 2시간 동안 고생한 이 분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오페라를 처음 본 사람의 솔직한 평가가 마음에 와 닿았다. 하루 저녁에 두 편의 치정 드라마를 잇따라 보는 게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멋진 음악의 여운, 화려하고 생기있는 무대의 추억이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