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올 첫 공연 - 안애순의 ‘몸쓰다-Writing, Using’
[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올 첫 공연 - 안애순의 ‘몸쓰다-Writing, Using’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5.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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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국립현대무용단(남정호)이 2022년 시즌 첫 공연으로 안애순 안무가를 초청했다. ‘몸쓰다’(4,1~3, CJ토월극장)란 제목에 ‘Writing’과 ‘Using'이란 단어가 병기되어 있다. 피와 살과 뼈로 구성된 하드웨어로서의 몸을 쓴다는 ’Using‘과 신경, 기맥 등으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로서의 두뇌활동인 ’Writing‘ 앞에 ’몸‘이 있다. 완전체로서의 심신(몸)이 작품의 주체인 것을 암시한다. 이 말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충동에 의해 발현되는 본능적인 몸짓이 아니라 안무가에 의해서 사전에 계획되고 되풀이 학습된 정교한 안무의 소산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어제보자’, ‘이미아직’, ‘공일차원’, ‘19금90’ 등 정상적인 국어로는 해석되지 않는 안애순의 어휘들과 같은 선상에 ‘몸쓰다’란 작품이 있다.     

실내체육관을 연상케 하는 널찍한 공간에 흰 운동복차림의 남자가 혼자 몸을 풀고 있다. 네 구석에서 등장한 남녀무용수들에 의해 무대는 곧 가득찬다.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편안한 운동복차림인 그들은 자기 나름의 동작에 열중한다. 여러 조각으로 나눠진 무대바닥이 전후좌우로 이동하고 아래위로도 움직인다. 변화하는 무대에 아랑곳하지 않는 무용수들은 묵묵히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침묵의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두 박자 혹은 세 박자로 반복되는 기계적인 음향이 무대를 건조하게 한다. 소리 중에는 국악장단도 포함되어있다. 7명 남자와 4명 여자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다양하다. 마네킹처럼 걷는 사람, 힙합동작을 연습하는 사람, 앉고 일어서고 엎드리기를 반복하는 사람, 달리고 회전하고 쫓아가고 구부리고 온갖 종류의 동작들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동작이 없는 것은 생각의 차이가 반영되고 신체 조건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 여인이 히스테리를 일으키듯 높은 음정으로 외치기 시작한다. 웃다가 울다가 비명을 지르곤 준비된 대사를 외우기도 한다. 뻣뻣한 몸들이 곡선위주의 부드러운 몸으로 변모되고 불안정한 무대가 점차로 안정을 찾아간다. “손잡아요 손잡아요...”란 노래 가락이 흘러나오며 그들은 짝짓기를 시작한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지만 혼성도 불가피하다. 마주서서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대결의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흑백 조명이 붉은 색 위주의 컬러풀한 조명으로 바뀐다. 아파트 창문처럼 나란히 늘어선 4각의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갇혀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포즈가 2중 3중의 실루엣으로 창문에 투영된다.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코로나시대, 무대를 잃은 무용수들의 고독한 몸쓰기가 아닐까.

관객의 공감에 선행하는 엘리뜨적 예술관의 한계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평범한 동작들에 안애순은 강력한 개념을 부여한다. 개념이 동작에 선행되고 관념과 아이디어가 작품의 핵심이란 주장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했던 ‘개념예술(conceptual art)’과 맥이 닿아 있어보인다. “관념과 개념이 작품의 중요한 측면이다. 관념은 예술을 만드는 기제이고 뒤따르는 동작은 형식적인 작업에 불과하다.(미, Sol LeWitt)“는 주장이다. 머스 커닝햄(무용)이나 마르셀 뒤샹(미술) 등으로 대표되는 개념예술은 작품에 대한 방대한 언어적 설명을 필요로 하고 난해하며 볼거리가 없다는 특성을 갖는다. 개념예술이 대중성을 얻기 어려눈 이유일 것이다. 안애순의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뷰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안무가의 주장이나 드라마트루그(김지연)의 해설, 비평가(이지현)의 프리뷰를 읽으면서 작품을 이해해야하는 관객들이 무대에서 직접적인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안애순의 전작인 ‘공일차원’(2016)을 보고 이렇게 썼던 기록이 남아있다.  

“무의미한 컨템퍼러리 논쟁을 거쳐 <이미 아직>, <어제 보자> 등 개념 위주의 작품에 치중하고 춤과 음악 등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팸플릿을 통해 관객들을 세뇌하고자 한 (국립현대무용단의) 거듭된 노력이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관객들의 만족보다 예술감독의 예술관이 우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15년 초연을 거쳐 두 번째 무대에 오른 <공일차원>을 보면서 관객을 가르치기 전에 관객으로부터 배우고 관객과 함께 하지 못하는 (국립현대무용단의) 한계가 아쉽게 느껴졌다.”

국립현대무용단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예대 교단에 선 안애순의 첫 작품 ‘몸쓰다’를 보면서 그 때의 느낌을 다시금 확인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작품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