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미술) 수상자 고정수 조각가 “예술가란, 매일 일기를 쓰듯이 작품을 해나가는 사람”
[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미술) 수상자 고정수 조각가 “예술가란, 매일 일기를 쓰듯이 작품을 해나가는 사람”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5.1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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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은 영광이면서, 책임이 뒤따르는 경험
만지고 싶고, 다가서고 싶은 조각 만들고파
여체상과 곰 조각, 생명의 유기성 존재
작품은 작가 삶의 총체적 결과물
5.13~6.19, 양평군립미술관서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 개최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고정수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풍만한 체형을 가지고 있는 여성상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안온하게 품어줄 것 같다. 여체 조각과 더불어 고 조각가의 대표 작품인 곰 조각을 마주하면, 더욱 큰 함박웃음을 머금게 된다. 아빠와 엄마 곰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아기 곰을 보거나, 말뚝 박기 놀이를 하고 앞으로 뒤로 구르고 있는 곰 조각을 보면 온 몸에 잔잔하게 따뜻함이 번진다.

고정수 조각가는 1979년 국전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81년엔 국전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 조각가는 국내 ‘여체 조각의 개척자’라고도 불린다. 서양미술로 만나는 것이 익숙했던 여체상에 동양적인 미감을 입혀냈다. 둥글고 풍만한 체구와 너그러운 얼굴 등을 하고 있는 그의 여체 조각은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생명력을 담아낸 결과였다. 여성을 관조의 대상이 아닌 생(生)의 동력을 가진 주체로 바라봤다.

고 조각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부드러움은 그의 작품 앞으로 더욱 많은 대중들을 이끌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국회의사당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으며, 2013년에는 그의 꾸준한 작품 생활을 짚어볼 수 있는 문신 미술상을 수상했다.

▲고정수 조각가 ⓒ김보섭 사진작가
▲고정수 조각가 ⓒ김보섭 사진작가

그의 또 한 번의 기록이 될, 제 13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미술) 수상을 축하하며 고정수 작가를 만나기 위해 양평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근간에 《십이지상(十二支像)》 전시를 마무리하고, 5월 달 전시를 앞두고 있는 그의 작업실은 생생한 활력이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작업실 면면에 내려앉은 묵직한 기운은 그가 오랜 시간 이 곳을 지켜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 조각가와의 인터뷰는 새로운 시도에 망설임 없이 나아간 경험담을 들어보는 기회였고,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온 원로 예술가의 신념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작업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된 만큼 기자는 고 조각가의 곰 조각을 든든한 동료처럼 옆에 두고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조각으로 풀어내고 싶다고 하는 고 조각가의 지향을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자매-II(국전 대상 수상작) 160x90x60cm,  브론즈, 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고정수 조각가 제공)
▲자매-II(국전 대상 수상작) 160x90x60cm, 브론즈, 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고정수 조각가 제공)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 수상을 축하한다. 당시에 일랑 이종상 화백의 축사를 인용하며 “실력을 갖추고, 인간이 되고, 건강해야한다, 그 말을 되새기겠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어떤 의미였는가.

시상식 당일에 일랑 선생의 축사에서 느낀 바가 컸다. 실력, 인간, 건강 모두 다 공감되는 바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내 은사인 전뢰진 선생이 생각났다. 올해로 94살이 됐다. 여전히 막걸리를 잘 드시고, 여전히 돌을 쪼고 계신다. 그분을 닮고 싶다는 얘기도 같이 했다.

상이라는 것은, 받으면 영광이지만, 남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에서 큰 책임이 따른다. 로뎅이 한말이 있다. “명예를 얻기까지 외로웠다. 명예를 얻고 나니 더욱 외로웠다”라는 말이다. 남의 이목을 받을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일이다. 그날, 일랑 선생님이 하신 말이 그런 책임에 대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상은 좋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이기에, 내 안에 일어난 생각들을 정리해 말하게 됐다. 상에 대한 책임과 오랜 시간 작가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었다.

‘여체 조각의 개척자’라고 불린다. 모성이 가득 담긴 풍만한 여체 조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근방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물인 비너스 상이 있다. 그 풍만한 여인상은 다산을 상징하고, 모성을 상징하고 있다. 나는 여성을 표현하되,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거나 상업적으로 소비성 강한 이미지가 아닌,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집중했다. 불변하는 푸근하고 넉넉한 이미지, 지고지순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모성은 부성과는 반대되고, 또 부성에는 아예 없는 어떤 감정과 개념이 있다. 후덕하고, 삭이면서, 너그럽게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그런 것들이다. 그 감정을 내 작품 안에 표현해봤다. 내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경험에서 기인한 것도 있다고 본다. 불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해 온 길이었다.

고 작가의 작품들은 부드러운 곡선과 풍만함이 가득하다. 작품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예술 작품은 뭔가 드라마틱하고, 남들을 깜짝 놀래킬 만한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평범하면서도 우리 일상생활 이모저모를 닮을 수 있는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는 더 큰 감동을 준다. 나는 그런 소소한 일상에 모티프를 두고, 작품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 일상에 모성이나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잘 부합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우리네 삶과 어머니, 모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서 작업해오고 있다.

▲양평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고정수 조각가 ⓒ서울문화투데이
▲양평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고정수 조각가 ⓒ서울문화투데이

모성과 일상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체를 조각해왔다. 그러다, 2015년에 돌연 ‘곰 조각’을 시작했다. 이미,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또 한 번의 시도를 한 것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

곰과의 인연이 있었다. 세종시에 ‘베어트리파크’라는 공간이 있다. 그 베어트리파크의 대표가 내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원 개관을 준비하면서, 내게 공원의 조각상들을 부탁해왔다. 그 곳에 곰과 희귀나무, 비단잉어들이 진짜 많았는데, 3년 동안 테마파크를 준비하면서 곰에 대한 작업을 해왔다. 반달가슴곰 새끼를 데려와 키우면서 관찰도 하고, 정말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봤다.

키우면서 보다 보니, 곰이 직립보행을 하고 그 것을 굉장히 익숙하게 해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과 닮은 구석이 많은 생물이라는 것을 느꼈고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곰에 대해 공부를 하다보니, 곰이 참 참을성이 많은 동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겨울에 동면하면서, 먹지도 않고 배설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동굴 안에서 견디는 습성 같은 것도 내게 흥미를 일게 했다. 형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내가 계속 추구해오던 풍만함과 곡선 같은 것이 맞아떨어졌고, 그런 인연 속에서 곰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어떤 유기적인 구조 안에서 여체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존재한다고 느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가족, 2170x7700x6300cm,  브론즈, 2015,  동탄2도시 한화아파트 소장
▲우리는 한 마음 한 가족, 2170x7700x6300cm, 브론즈, 2015, 동탄2도시 한화아파트 소장 (사진=고정수 조각가 제공)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곰 조각을 시작했을 때,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곰’이라는 주제가 지닌 어떤 팬시(fancy)적인 측면에서 나온 우려이지 않았을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테디베어나 곰돌이 푸 같은 것들. 작품에 있어서 예술가의 작업으로 순수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걱정되진 않았는가.

아내가 내 대학교 3년 후배인데, 한 번은 내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곰이야?”라길래, “내 맘이야”라고 대답을 해줬다. (웃음) 작가는 자유인이다. 작가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누구한테 간섭받지 않고 뜻대로 헤쳐 나가는 것이 장점이자 긍지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던 짓이나 해라, 왜 엉뚱하게 동물 작업을 하느냐’라고 지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작품을 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을까 말까 고민해본 적은 없다. 단 한 번도, 이 작품이 팔릴까 안 팔릴까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그냥, 그냥 하는 거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이 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지, 그렇게 주저하고 남들을 의식하고 어려워한다면 내가 왜 아티스트가 됐을까 싶다.

아티스트의 자세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것이다. 곁눈질 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일기 쓰듯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티스트의 길이다. 작업을 하면서 초조하거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사실, 곰이 그런 팬시적인 이미지나 상업화에 강한 것인 줄은 잘 몰랐다. 내 작품에서 어떤 차별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내 방식대로 작업하고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다 구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곰 작업을 하면서 재료 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도 경험했다. 여체 작업을 할 때는 돌이나 브론즈를 사용했는데, 곰 작업을 하면서 에어볼룬 작업도 하게 됐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개업 공기 풍선 같은 것을 보고 작업에 응용하고 싶다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석촌 호수에 러버덕이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의 일치였다. 현재 내가 작업한 공기조형물이 멕시코로 가고 있는 중이다. 공기 조형물은 이동이 용이해서 해외 전시가 편하다. 내가 원해서 나아간 길이 결국엔 다들 다다를 곳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인물 메인 2)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미술)을 수상한 고정수 조각가 ⓒ김재성 사진기자
인물 메인 2)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미술)을 수상한 고정수 조각가 ⓒ김재성 사진기자

지난해에 《십이지상(十二支像): 누구나 만져도 되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작품을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은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했을 것이다. 특별히 이런 전시를 기획한 이유가 있었는가.

촉각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1993년에 대전 엑스포에서 한 《촉각 조각전》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전시에 와서 작품을 손으로 만지면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후 시각장애인들이 그날 경험에 대해서 점자로 감상문을 썼는데, 비장애인 못지않게 굉장히 구체적인 감상문을 적었다. 정말 작품을 제대로 감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내게 굉장한 충격이었고, 이후에 촉각에 대해서 심오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조각은 이런 촉각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지점에서 우수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조각도 회화와 같이 순수미술에 속하지만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회화는 평면이고 색채적이면서 2차원적이다. 이에 비해 조각은 3차원적인 공간예술이고 시각예술이자 촉각예술이라 할 수 있다.

조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조각이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세종대왕상, 김일성 장군 동상 같이 중압감을 주고 교조적인 조각이 있는가 하면, 덴마크 코펜하겐에 인어공주 상같이 만지고 싶고, 사랑스러운 존재감을 갖고 있는 조각들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만지고 싶어 하는 작업. 다가서고 싶은 작업들을 꾸준히 해왔다. 그런 욕구들을 충족시켜주고, 촉각의 경험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우연적 변화는 체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변화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필연적으로 오거니와 (중략) 난 나의 육화된 감성만을 신뢰한다” 고 작가가 쓴 글을 보고 변화에 대한 작가만의 주관이 있는 것 같았다.

특별한 신조나, 생각이라기엔 너무 거창한 것 같다. 육화된 감성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예술인의 공통분모라고 생각한다. 작품이라는 것은 결국 삶의 총체적인 결과물인데, 육화되지 않는다면 표현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냥 아무거나 그냥 할 수는 없기에, 작품이 피어나는 삶을 참되게 살아야 할 것 같고, 뭔가 타협하지 않고, 외골수로 살아가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올바른 길이 아닌가 싶다.

미켈란젤로도 조각가이지만,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혼자 다 그렸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 참담하고 치열한 삶에서 감동을 받는다. 인파에 휩쓸려서 구경을 다니던 사람들도 천지창조 앞에 가서 서면 모두 고요하게 작품을 응시한다. 사람들이 천지창조를 보면서 구도가 참 좋고, 인물묘사가 어떠하고, 이런 것을 논하지 않는다. 작품이 품고 있는 힘과, 한 인간이 작품을 혼자 감내하면서 일궈낸 시간과 신념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작품에 집착할 수 있었던 집념에서 감동할 수 있었다.

예술가는 사후 70년간 저작권이 있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가 죽더라도, 자기가 불어넣은 생명들은 창작자 사후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예술가는 보통사람들보다 배로 사는 것 같다. 그에 따른 책임을 감내해야하고, 그 책임은 의도적으로 지는 것이 아닌 체질적으로 몸에 베이게 해야 한다고 본다.

▲너에 평화가 있기를-1,100x73x52cm, 대리석, 1996
▲너에 평화가 있기를-1,100x73x52cm, 대리석, 1996 (사진=고정수 조각가 제공)

작가로서의 책임은 어떤 것일까. 고 조각가의 얘기를 들어보니, 어떻게 그런 지난한 삶을 견디고 살아왔는지도 궁금하다.

작가에 대한 논문이 나온다면,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론’ 이렇게 발표되면 꼭 뒤에 부제로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작품’이 붙곤 한다. 작가는 그의 생애와 작품으로 절반씩 이해된다. 한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런 과정 속에서 이러한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가로서의 책임은, 책임이라기보다 자기 사명감과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떤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28살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된 경험이 있다. 교수는 65세 정년이 정해져있고, 일주일에 12시간만 일해도 봉급이 나오는 좋은 직종이다. 하지만, 후진양성을 해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이 따르기도 한다. 한 번은 교수 시절에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학생이 연구실에 찾아와서 “교수님 작품 좀 봐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 지금 작업하고 있으니, 나중에 수업시간에 봐줄게”라는 얘기는 절대 못한다. 그때 나는 내 작업을 멈추고, 학생 학년에 맞춰서 이야기를 해줘야 했다. 학생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23,24살 학생들의 시선과 언어를 배워야했고, 그 학생은 성장해가지만 작가로서의 나는 멈춰있어야 했다. 65세까지 남아있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1살에 교수직을 그만뒀다.

당시에 고민이 정말 많았는데, 대학 3년 후배인 아내가 그렇게 고민스러우면, 그만 두라고 했다. 그래서 결심하고 교수직을 떠났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부정기적인 수입원으로 살아가야 했고, 우리나라에서 학자가 가진 그런 좋은 이미지도 버리다보니 힘든 삶을 살긴 했다.

아내한테 미안한 마음도 존재한다. 작업을 해야 할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작업의 기회를 내게 양보했다. 옛날엔 명절마다 학생들이 교수 댁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한 번은 여학생들이 집에 찾아와서 인사를 하길래, 교수로서 해줄 얘기가 마땅한 것이 없어서 “꾸준히 공부하고, 앞으로 너의 작업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서 작업을 이어나가라”라는 얘기를 해줬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여학생들을 돌려보냈는데, 아내가 그때 “당신 참 말은 참 잘합디다”라고 툭 얘기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아내가 포기한 것이 있다는 걸 내가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내가 좀 못된 구석이 있다.(웃음)

어찌됐든, 나는 학생들을 성장시키면서 내 작가로서 자아를 성숙 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나와는 안 맞는 길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삶은 유한한 것이고, 주어진 자기 삶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넌센스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힘든 삶을 유지하고 있는 전업 작가들에게 많은 조명이 비춰지길 언제나 바란다.

▲양평 고정수 조각가 작업실 앞 마당엔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양평 고정수 조각가 작업실 앞 마당엔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지난해 양평 카포레 전관에서 마친 《고정수 50년 회고전》의 수익금을 중증장애 시설에 기부한 바 있다. 작가로서 큰 결심이었을 것 같다.

중증장애 시설인 ‘소망의 집’은 하남에 있는 곳이다. 로타리클럽에서 연이 닿아 20년 전부터 도와주고 있었다. 한 번은 그곳에 방문해서 목욕 봉사를 했다. 당시에 탯줄 끊은 지 얼마 안 된 여자 갓난아기의 목욕을 도왔다. 중증 장애를 가진 아이였고, 목욕을 돕는데 아이가 물이 뜨거운지 앵-하고 울었다. 그때 기분이 참 이상했다. 정말 데려가 키울까 생각도 했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당시에는 아이가 금방 죽을 것 같아서 어떡하나 그런 생각도 했다. 그 아이가 지금은 17살이 됐다. 잘 살고 있다.

소망의 집은 박현숙 원장이 운영하고 있다. 남편은 고물상을 하고, 박 원장은 아주 헌신적인 교회 장로다. 지금 소망의 집에선 2,30명의 중증 장애인을 보살피고 있다. 원래 소망의 집은 서울에 있었는데, 몇 년 전에 하남시로 시설을 옮겼다. 그 때쯤에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박 원장이 시설을 옮기려하는데, 시설이 들어갈 동네 주민들이 시설 입주를 반대해서 박 원장이 주민들을 만나러 가야하는 일이 있었다.

하필이면, 시설 고문변호사와 시간이 맞지 않아서 박 원장 혼자 주민들을 먼저 만나러 가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냥 안부 차 전화를 했는데, 박 원장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엉엉 울어서, 차분하게 생각해서 이야기를 했다. 딱 두 가지만 전달하라고 했다. “먼저 첫 번째, 여러분도 나이가 들면 장애인이 된다. 귀가 안 들려서 보청기를 끼고, 눈이 안 보여서 돋보기를 끼지 않는가. 그리고 두 번째, 시설의 아이들은 외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하라 했다. 어찌됐든, 그 반대를 넘어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전화가 왔는데, 주민 허락을 받았다고 감사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카포레 전시는 내 50년을 돌아보는 전시였다. 이왕 50년을 돌아보는데 캠페인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플랜카드를 걸고 전시를 열었는데, 어느 날엔 지인이 찾아와 전시를 보더니 “좋은 일을 하시네요. 계좌번호 알려주십쇼”라고 했다. 그러더니 100만 원을 보내줬다. 이 세상이 그냥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한 500만 원 정도와 떡과 고춧가루를 전달했다. 봉사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오랜 인연으로 이뤄진 결실이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34x27x21cm, 대리석, 2014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34x27x21cm, 대리석, 2014 (사진=고정수 조각가 제공)

앞으로의 전시 계획과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도전이 있다면 듣고 싶다.

양평군립미술관에서 큰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5월 13일에 시작해 6월 19일까지 열리는 전시인데,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으로 이상찬 작가와 함께 전시 한다. 가을쯤에는 갤러리 초대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일정은 없다.

새로운 시도는 어떻게 나아갈지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될 수도 있다. 항상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만 발동이 걸리지 않을 뿐이다. 가끔은 정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 깨기도 한다. 여체 작업을 하고 곰 작업을 하면서, 소재도 돌과 브론즈를 넘어 알미늄, 에어볼룬까지 넘어왔다.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불허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 지.

어떤 예술가로 기억될 지는 제 3자의 몫이라고 본다.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은, 그냥 자기가 매일같이 일기를 쓰듯 작품을 하고, 어느 정도 작품이 모아지면 어딘가에 발표를 하고 그렇게 나아가는 길이다. 앞으로 고정수가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느냐,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내 나름대로 나는 여체와 곰의 유기성에 대해 인지하고, 생명과 일상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남이 인정해주고 발견해주느냐는 다른 문제다. 매일 나아가고, 내 캐릭터를 가꿔가는 작업만이 나의 일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