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베세토오페라단 '라보엠', '5월의 크리스마스‘, 멋진 음악으로 감동 선사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베세토오페라단 '라보엠', '5월의 크리스마스‘, 멋진 음악으로 감동 선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2.05.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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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오페라축제 참가작,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그려내
우크라이나 지휘자 아나톨리 스미르노프 특별 초빙, 공연 수익금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의미 더해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 객원기자, 한국 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 PD연합회 정책위원

푸치니의 <라보엠>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5월인들 어떠랴.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언제 봐도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예술가의 꿈을 잃지 않는 젊은이들(시인 로돌포,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도 콜리네), 뜨개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미미,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무제타….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은 미미의 때이른 죽음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도 꿈많은 젊은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리하여 <라보엠>은 우리 시대의 가슴 시린 이야기가 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

베세토 오페라단(단장 강화자)이 제20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라보엠>은 아름다웠다. 무대를 꽉 채운 출연자들, 세트와 의상과 소품, 그리고 오케스트라까지 힘을 합쳐서 충만한 음악과 드라마로 관객들을 만족시켰다. 우크라이나 지휘자 아나톨리 스미르노프를 특별 초빙했고, 공연 수익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보탠다니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 그가 지휘한 소리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풍성한 사운드로 푸치니 음악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선명하게 전달했다. 현악과 목관과 금관의 물결은 <라보엠>의 따뜻한 분위기를 때로는 품어주고 때로는 끌어올려 주면서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날 출연자 중 미미 역의 소프라노 김지현이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 정확한 음정, 섬세한 표현력으로 미미의 가련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잘 표현했다. 1막 <내 이름은 미미>는 워밍업이 덜 됐는지 약간 소심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큰 박수를 받았다. 작별의 3막에서 그녀는 최상의 기량을 선보였다. 로돌포 역의 테너 지명훈과 함께 부른 작별의 이중창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지명훈은 미성의 테너로서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 표현이 뛰어났다. 1막 <그대의 찬손>은 훌륭했지만 “라 스페란차” 대목이 좀 더 강렬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막 피날레는 관객들을 충분히 몰입시킨 좋은 노래였지만 두 사람의 마지막 음이 완벽한 일치에 이르지 못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3막 로돌포와 미미의 이중창은 <라보엠> 3막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보기 드문 열창이었다. 

2막에서는 무제타 역의 강혜명이 엄청난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크게 활약했다. 그녀가 부른 무제타의 왈츠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선이 굵은 연기는 자연스레 관객들의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냈다. 마르첼로 역의 바리톤 박경준, 쇼나르 역의 바리톤 김성국, 콜리네 역의 베이스 이준석 모두 고른 실력과 성의 있는 연기로 관객들을 만족시켰다. 덩치 큰 남자들이 순박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귀여운 모습은 관객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다. 남성 출연자 중 특히 마르첼로 역의 박경준은 풍부한 성량과 섬세한 표현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오케스트라 음량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성악 솔로가 오케스트라에 파묻혀 버린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미미 역의 김지현과 마르첼로 역의 박경준만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노래할 때도 선명하게 목소리가 잘 들렸다.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 베세토오페라단의 '라보엠'의 무대인사의 한 장면.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 베세토오페라단의 '라보엠'의 무대인사의 한 장면.

훌륭한 공연을 위해서는 무대 미술과 의상, 자막까지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무대 디자인은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어서 보기에 편안하고 즐거웠다. 특히 2막에서는 군악대 행렬과 패션모델까지 다양한 볼거리로 청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자막은 깔끔하고 단정해서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잘 먹고 잘 사세요, 아이구, 고맙소”, 또는 “라면을 먹어야겠어” 등 우리 정서에 맞는 자연스런 구어체로 번역한 것도 공감을 일으켰다. 다만 띄어쓰기를 손질할 여지가 있어 보였고, 말줄임표를 ‘...’이 아니라 ‘…’로 해 주면 좋았겠다. 

1막과 2막 사이, 3막과 4막 사이에는 해설자가 등장해서 무대 교체할 시간을 벌 겸, 친절한 설명을 제공했다. 첫 등장에서 ‘5월의 크리스마스’라 한 것은 재치있었고, ‘맘껏 박수를 쳐 달라“고 조언한 것은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다. 2막, 막이 오르자 어린이/어른 합창단과 패션모델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제히 박수를 보냈고 출연자들은 관객들의 환호에 큰 용기를 얻어서 한껏 실력을 발휘했다. 해설자의 멘트 중 1막, 3막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 준 부분은 중언부언(redundancy) 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청중들은 이미 들은 얘기를 또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주면 좋겠다. 

이 날 함께 공연을 본 친구는 말했다. “로돌포는 사랑하는 미미가 죽을 병에 걸리자 떠나 버린 반면 미미는 죽기 직전 로돌포를 찾아와 그의 품에서 죽는다. 이건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이다.” 미미를 청순가련한 여성으로 묘사함으로써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을 일방적으로 그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19세기 오페라가 여자 주인공의 희생으로 남자 주인공의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판에 박힌 구성을 따르는 건 시대의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라보엠>은 시대를 너머 21세기의 우리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주었다. 친구도 이날 공연이 음악, 연기, 무대 등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