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삶의 찬가, 말러 <아다지에토>Ⅲ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삶의 찬가, 말러 <아다지에토>Ⅲ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5.2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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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호에 이어)

2악장 ‘폭풍처럼 움직여서, 가장 격렬하게’, 1악장에 제시된 슬픔과 고뇌가 더욱 사납게 물결친다. 음악적 갈등이 깊어지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곤 하는데, 이때마다 극적인 반전으로 새로운 음악적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기법을 아도르노는 ‘개파 형식’(Durchbrucksform)이라고 불렀다. 분노의 모티브에서 평화의 모티브로 반전하는 대목은 2악장에서 가장 매혹적이다. 이 교향곡의 클라이맥스는 2악장 종반에 펼쳐지는 금관의 코랄이다. (링크 25:08) 얼어붙은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하지만 이 찬란한 대목 역시 유령 같은 무시무시한 수렁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다. 

3악장 ‘스케르초’, 말러는 “삶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죽음 안에 있다”란 옛 격언을 인용하여 이 악장을 설명했다. 삶의 즐거운 순간을 회상하는 이 대목에서도 말러는 죽음의 상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4악장 ‘아다지에토’에서 휴식 없이 이어지는 5악장 ‘피날레’는 1악장 ‘장송행진곡’과 대조를 이룬다. 1악장의 고뇌는 피날레에 가득한 기쁨의 함성으로 반박된 것처럼 보인다. ‘아다지에토’의 주제가 빠르게 헤엄치고, 심지어 2악장에서 언뜻 얼굴을 비친 금관의 찬란한 코랄이 환희의 노래처럼 울려퍼진다. 이 당당한 피날레로 말러의 회의와 공포와 불확실성은 모두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듣기에 1, 2악장의 어두운 그림자는 5악장 피날레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알마는 클림트, 코코슈카 등 빈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뮤즈였고, 그 자신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아다지에토>처럼 황홀하고 평화롭지는 않았다. 약혼 무렵, 말러는 그에게 작곡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였는데 알마는 고민 끝에 이 요구를 받아들였고 결혼 후에는 아내 겸 조수 노릇을 했다. 결혼 직후 말러는 뤼케르트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에 음악을 붙였는데, 알마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이 노래가 예언이라도 한 듯, 1907년 큰딸 마리아가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그해 말러는 심장병이 생겼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치닫게 된다. 결혼 이후 음악가의 정체성을 잃고 시들어 가던 알마는 젊은 조각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열렬한 구애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로피우스는 알마에게 뜨거운 감정을 고백하며 결혼해 달라고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말러 앞으로 배달됐다.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말러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말러는 자기가 젊은 알마의 재능을 질식시켰기 때문에 그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말러는 알마에게 작품을 쓰라고 권했고 출판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알마는 훗날 회고록 <나의 삶, 나의 사랑>(1958)에서 “나는 그의 정신을 사랑했을 뿐, 그의 육체는 내게 허깨비 같았다”고 썼다. “처음부터 그의 냄새가 싫었다”는 극단적인 표현은 물론, “나는 그의 음악을 좋아한 적이 없다”는 놀라운 고백까지 나온다. 열렬한 ‘말러 매니아’들은 알마의 이런 태도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가 화가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말러에게 애착을 가졌고 그래서 남편으로 선택했다는 프로이트의 해석을 감안하면 그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 말러가 결혼 이후 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건 그의 희생과 도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알마에 대한 사랑 고백인 <아다지에토>를 그가 싫어했으리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