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정구호를 걱정하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정구호를 걱정하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05.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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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2021)와 일무(2022)를 다르게 평하는 근거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국립무용단의 ‘산조’(2021) 홍보영상과 이미지를 보았는가? 영상 속 여인은 뱅글뱅글 돌다가, 머리 위 비녀와 같은 소품을 마치 칼처럼 손으로 훑었다. 시선강탈(視線强奪). 거기엔 그것만 있었다. 산조를 쉽게 이해시키는 글에선, ‘산조는 넥타이를 풀고 듣는 음악’이라 한다. 옥죄임에서 풀림으로, 얽매임에서 느슨함으로 가려는 의식이 산조다. 그러할진대 무용수에게 가체(加髢)를 얹힐 수 있을까? 

산조가 배격하는 게 과장과 인위다. 산조는 ‘인위적 무게감’과 ‘의도적 형식성’을 거부한다. 산조는 ‘흐름’이다. 산조를 연주하고 추는 사람은, 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몸에 흐름이 배어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발상과 그런 동작이 나올 수가 없다. 모든 작위적인 건, 산조로 인정받기 어렵다. 

2013년부터 시작해서, 정구호는 계속 주목을 받았다. 정구호에 대한 저널리즘과 무용계의 찬사는 이어졌다. ‘비우고 정리하니 이토록 화려’하다 했고, ‘정구호의 새로운 전통혁명 프로젝트’라고도 명명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그간 정구호가 관여한 공연이 모두 그렇다. 비주얼의 강렬함을 살려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이 마치 한국춤의 새로운 방향처럼 극찬하는 모습이 때론 이해할 수 없다. 평론가들이 일반 관객의 호응으로 의식해서 ‘할많하않’으로 자제하는 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했으나 어떤 무용평론가는 “안무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에서 무용이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을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다”고 극찬한다. 비주얼과 연관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정구호가 연출한 작품에서 한국춤의 기본이 되는 호흡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움직임의 생동감과 편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구호는 한 인터뷰(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지만, 거기에는 미학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예술에는 정답은 없지만, 기준은 분명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정구호의 이런 발언과 연관해서, 정구호에게 그대로 질문하고 싶다. 정구호 자신이 생각하는 ‘산조의 기준’은 무엇인가 묻고 싶다. 

정구호의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 시대의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 정구호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의 작업이 ‘전통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계속 응용’하는 작업이라고 확신하는 점이다. 그 자신은 그렇게 할지 모르나. 전통의 본질을 오래도록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레벨이 너무도 높지 않은게 유감이다. 자신이 전통을 깊게 바라보고 해체하면서 결합한다고 생각한다는 오산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일무’ (5. 19 ~22.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선 무용(정혜진, 김성훈, 김재덕 안무)에선 그런 부분이 발견되었다. 1장의 ‘일무연구’와 2장의 ‘궁중무연구’에서 ‘연구’라는 말이 그냥 하는 수사가 아니었다. 난, 1막과 2막의 가치와 성과를 인정한다. 일무의 느린 동작을 마치 빠르게 연결했을 때의 ‘같은 동작, 다른 느낌’이라거나, 전통적인 궁중무의 움직임을 신체 부위를 달리해서 적용할 때의 ‘다른 부위, 같은 느낌’ 등을 살려냈다. 

정구호, 그에겐 삭힘이 없다. 

정구호가 ‘젠스타일’에서 출발한 건 누구나 잘 안다. 젠은 선(禪)의 일본 발음이다. 정구호의 젠 스타일은 선(線)은 있으나, 그것을 선(禪)과 연결될 수 있을 만한 깊음은 아직 발견되진 않는다. 

왜 그럴까? 정구호의 작품의 아쉬움은 삭힘(ferment)의 부재이다. 한국음악에서 ‘시김새’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삭힘’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거나 견디면서 자연스럽게 그리되는 것이다. 신작이라고 해서 삭힘이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니다. 

정구호의 작품은 정말 파격(破格)일까? 정구호가 다루고 있는 무용 또는 공연의 내용성에서 본다면, 그렇지 않다. 단지 정구호만의 무대연출의 다름이 존재할 뿐이다. 파격이란 무엇일까? 장르 또는 예술의 정격(正格)에 충실하면서 거기서 탈격(奪格)을 만들어낼 때, 거기서 예술의 생명력이 나온다. 정구호작품을 그래도 파격이라고 한다면, 무대의 공연적 비주얼에서 볼 때만 그렇다. 그러나 이 또한 아트북 매니아의 시각에서 보면, 정구호만큼 아트북적 발상이 발견되는 연출도 드물 거다. 

정구호를 극찬한다면, 그가 ‘이종결합’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내게 정구호는 전통을 깊이 연구해서 거기서 무엇을 끄집어낸 사람이라기보다는, 서구에서 발행한 비서구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한 아트북을 열심히 탐독하면서, 거기서 탐미적인 요소를 끌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정구호의 탁월한 감각이요, 탐미적 결과로서 인정은 하겠지만, 이런 정구호의 성향을 한국의 고유한 전통과 연결한다는 것은 어불성성(語不成說)이다. 

일무, 인위적 무게감과 의도적 형식성

일무에선 왜 정구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일무라는 자체가 ‘인위적인 무게감’과 ‘의도적인 형식성’을 드러내려는 ‘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다. 산조는 태생적으로 예술을 전제로 한 ‘놀이’이기에 이 출발부터 다르다. 산조에선 개인이 중시되지만, 일무는 집단을 강조한다. 

일무의 뿌리는 중국이다. 2일무에서 8일무까지 그 인원수의 제한부터가 그대로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 춤에서는 무게감과 형식성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일무는 정구호 연출 스타일에서, 여러 면죄부를 제공해주고 있다.

여기서 꼭 짚을 게 있다. “한국무용 공연에는 정사각형 무대보다 직사각형 무대가 더 어울린다” 이건 정구호의 매우 주관적 견해다. 패션쇼 무대에 익숙한 이의 발상이다. 일무는 기본적으로 정사각형 지향이다. 일무는 권력을 가진 ‘정착자’의 권위적 예술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사각형은 정착적 의미, 직사각형은 이동적 의미가 강하다. 거실은 정사각형이요, 복도는 직사각형이지 않은가? 따라서 한국무용이 직사각형 무대에 어울린다는 것은 정구호의 생각과 판단일뿐, 일반화시키기가 어렵다. 

배색효과 & 젠더리스 

정구호를 인정한다면, 두 가지 측면이다. 첫째는, 정구호 특유의 배색 효과 (color effects). 

이것은 기존과 철저하게 차별하고자 하는 의식에 기반한다. 영화 ‘황진이’(2007)에서 송혜교가 입은 검은 저고리가 한 예가 된다. 한국의 전통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안다면, 검정 저고리를 입긴 쉽지 않다. 정구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치는, ‘전통적이고 미학적’이라기보단 시대적인 유행을 전제로 한 ‘찰라적이고 탐미적’ 센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다. 

둘째는, 젠더리스 지향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그랬다. 정구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을 때, 무대의 인물에서 성별을 구별한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건 안은미 작품에서,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눈에 비친 정구호는, 영리한 예술가와 현명한 사업가의 교집합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인풋과 아웃풋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면서 ‘가성비’가 중시된다면, 그런 대차대조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정구호이다. 그는 ‘선택과 집중’의 달인이다. 정구호의 작품에선 ‘사업가 마인드’는 읽혀도, ‘예술가 마인드’는 덜하다. ‘가성비’를 중시한 ‘최소장치의 최대효과’를 통한 인풋과 아웃풋의 상관이다. 

정구호는 ‘시각적’ 이종교배에 성공했으나, 이어서 전달되는 미학이 매우 약하다. 전통에 대한 숙고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결합하는 ‘자기 주도적’ 방식이 약하다. 앞으로 어느 단체가 정구호에게 작품을 계속 의뢰한다면, 또한 정구호가 앞으로 이런 경향의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간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심히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