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무용단 더블 빌 공연- 차진엽의 ‘몽유도원무’와 고블린파티의 ‘신선’
[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무용단 더블 빌 공연- 차진엽의 ‘몽유도원무’와 고블린파티의 ‘신선’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5.25 09: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기막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초기 궁중 화원이던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려낸 것이 4월 21~24일(1447)의 사흘간이었다고 전해진다. 국립무용단이 현대무용가 차진엽을 초청하여 안무를 맡긴 더블 빌 중 한 작품인 ‘몽유도원무(夢遊桃源舞)’가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의 몸으로 국립극장(달오름) 무대 위에 재생된 날자 또한 4월 21~24일이었다.

안견의 그림으로 탄생한 대군의 꿈이 소재가 된 차진엽의 작품은 도연명-안평대군-안견으로 이어지는 전설 속의 유토피아를 575년의 시차를 두고 이 시대로 소환했다. 복숭아꽃 만발한 선경에서 속세를 잊고 살아가는 도화원(桃花園)은 전염병과 전쟁과 당파정치로 오염된 지구촌에서 고통 받는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 나는 공연 셋째날인 토요일(4.23) 오후 3시 공연을 보았다. 

무대는 2중 구조로 시작된다. 무대 전면에 투명한 가림막이 나지막이 쳐 있다. 그 뒤에서 앉은 자세로 춤추는 남녀무용수들이 뒤얽힌 몸짓이 막에 투영된다. 무대 뒷벽은 거대한 캔버스다. 춤추는 듯 거침없는 붓질로 그려지는 수묵화가 속세와 구별된 자연의 순수함과 웅장함을 묘사한다. 가림막이 걷히며 숨겨졌던 사람들이 실상이 드러난다. 그들은 여전히 어지럽게 얽혀 있다. 나그네 하나가 무겁게 짊어진 등짐에 휘청거리며 무대 앞을 가로질러간다.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들이 괴나리봇짐 하나씩을 들쳐 맨 채 뒤를 따라 어디론지 떠나간다. 어두운 현실세계를 벗어나 피난처를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과 자연을 2분법적으로 배치해놓은 무대에서 흑백으로만 펼쳐진다.  

두 여인이 등장한다. 복사꽃 향기가 날리듯 은은한 핑크색으로 치장하고 머리엔 긴 비녀를 꼽았다. 천정에서 기다란 족자가 내려온다. 그녀들은 족자 속에서 태어난 선녀들이고 족자는 그들이 펼쳐갈 새로운 세상이다. 분홍색 조명, 녹색으로 물든 바닥과 뒷벽,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날리는 수묵의 세계와 무대 한 쪽에서 잔잔하게 연주되는 거문고(심은용)의 음률은 속세를 떠나 도화원을 찾은 사람들이 꾸려갈 새로운 세상을 상징할 것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몽유도원도’는 현실과 자연과 미래를 한 폭 평면 안에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서사적 그림이다.

차진엽은 그림의 평면구조를 시공간(時空間)으로 확장한다. 속세와 자연을 무대공간으로 양분하고 현실과 미래를 시간적으로 배열하며 서사력(敍事力)을 확대한다.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인 무용의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고전에서 찾아낸 소재를 텍스트로 국립무용단원들의 완숙한 춤과 그녀의 현대적 안무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차진엽은 세계시장을 겨냥한 국립무용단(손인영)의 기획의도를 가시화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신선한 소재와 감성적인 의상(최인숙), 거문고와 전자음악의 조화, 춤과 영상을 날줄과 씨줄처럼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보여준 작품의 전달력은 2021년의 ‘겨울나그네’에 이어 2022년에 이루어낸 차진엽의 새로운 성취일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회, 시대를 넘어 어디에서 풍류를 찾을까

더블 빌을 구성한 다른 작품은 고블린파티의 ‘신선(神仙)’이다. 지경민•임진호•이경구의 공동 안무로 국립무용단원들의 춤을 빌렸다. 무대에 설치된 세 대의 마이크, 흑색과 백색 의상을 반반씩 갈라 입은 8명 남녀무용수, 그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소개를 시작한다. 춤꾼, 신선, 술이 키워드다. 술잔과 술상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무용수들은 술잔이 고정된 소반 하나씩을 끼고 무대를 누빈다. 잔들이 부딪치고 소반에 손가락 장단을 맞추며 권주가가 울려 퍼진다. 춤계를 선계에 비유하고 신선을 술꾼으로 묘사한 텍스트는 전설적인 중국도교(道敎)의 8선(八仙)에서 모티브를 찾은 듯하다.

그러나 술판이 어지럽게 펼쳐지는 무대는 안무자가 보여주고자 한 선계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춤에 몰입함으로써 신선의 자유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구도과정 역시 무대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설득력 있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음악과 의상 등 무용요소를 최적화하고, 자신들의 안무특성을 국립무용단의 춤과 조화시키는 노력은 관객의 공감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일 것이다. “관객과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관객시각을 확장해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그들의 다짐을 실천하기엔 내공이 아쉬웠다. ‘범내려온다’ 식의 가벼운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진지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공의 깊이를 쌓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