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한국창작춤의 기원, 역사 재발견
[성기숙의 문화읽기] 한국창작춤의 기원, 역사 재발견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6.0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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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창작춤 1978, 우리는 이렇게” 공연은 기억과 회고, 그리고 성찰 통한 재발견 기회 제공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이른바 다다이즘(Dadaism)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출현한 허무주의 예술운동을 말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에서 비롯된 혁명적 예술운동이자 반(反) 예술운동으로 간주된다. 다다의 전통 부정은 근대문명을 지배한 유럽의 정신과 이성적 산물인 합리주의를 파괴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예술사조는 전대(前代) 예술에 대한 부정과 파괴, 그리고 저항에서 기원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까운 과거, 우리 무용사에도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몸짓에서 촉발된 춤사조가 존재했음은 퍽 의미롭다. 1970년대 중반 등장한 한국창작춤이 좋은 예이다. 한국창작춤은 신무용(新舞踊)에 대한 부정과 저항에서 싹터 나왔다. 20세기 초반 출연한 신무용은 서양 모던댄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우리 전통춤과 접목하여 새로운 극장예술춤으로 승화된 일종의 춤사조를 의미한다. 1970년대 한국창작춤이 도래함에 따라 근대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신무용은 서서히 종식되기에 이른다.    

40년 전 공연무대 소환

한국창작춤 초창기 공연미학의 한 편린을 마주하는 뜻깊은 무대가 열렸다. 지난 5월 19일 서울 방배동 두리춤터에서 선보인 “한국창작춤 1978, 우리는 이렇게”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타이틀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창작춤 제1세대 주역들이 옛 기억을 반추하여 1978~1981년 사이에 치러진 창무회 초창기 공연무대를 소환했다.

무대는 전통춤과 창작춤으로 꾸며졌다. 당시 공연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우선, 임현선이 궁중정재의 꽃 <춘앵전>으로 막을 열었다. <춘앵전> 고유의 아정한 미감으로 속 깊은 멋을 과시했다. 태평무의 명인 임현선이 정재에도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최은희, 이애현의 2인무로 선보인 <나비춤>은 불교무용을 일컫는 작법무(作法舞)의 한 절목이다. 양팔을 좌우로 펴서 나비의 형상을 한 채 물 흐르듯 유연하고 절제된 움직임이 연속되는 무대는 한층 집중감이 조성된다. 두 사람이 연출하는 밀착된 교감은 불교의 인연의 끈을 연상케 한다. 아울러 시종 정중동적 움직임에 투영된 고요한 침묵은 종교적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창무회 초대 회장을 지낸 임학선은 <산조춤>을 선보였다. 가야금 선율을 타고 넘는 단아하고 섬세한 춤사위가 맵시를 더한다. 맺고 풀고 얼르는 춤사위에서 예사롭지 않은 내공을 엿본다. 숙성된 미감을 바탕으로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특유의 아카데믹한 정서가 인상적이다.

군무로 선보인 <도르래>는 단연 주목된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등 불교의 윤회사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광목 소재의 황토색 한복을 착용한 여섯 명의 춤꾼은 긴 끈으로 서로를 결박한 가운데 삶의 숙명을 담대하게 그려낸다. 극도의 절제된 움직임은 표현성 짙은 회화적 수법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무대는 진한 감동을 안겨줬다.

“한국창작춤 1978, 우리는 이렇게” 공연은 기억과 회고, 그리고 성찰을 통한 재발견의 기회를 제공했다. 일체의 지원없이 자발적으로 공연이 꾸려졌다는 점도 동기의 순수성을 배가한다. 무대의 주역은 임학선, 윤덕경, 임현선, 최은희, 이노연, 이애현 등 여섯 명의 춤꾼으로 압축된다.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동문들로 대부분 대학 교수 또는 공공무용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한국창작춤의 예술적 진화를 견인한 대표적 무용가들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한국창작춤 제1세대 주역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1976년 12월 이화여대 한국무용 전공 졸업생들은 ‘한국춤의 현대화’를 화두로 한국창작무용연구회(창무회)를 결성한다. 알다시피, 창무회는 이화여대 무용과 한국무용 전공 졸업생들로 구성된 동문단체로 명성이 높다. 

<도르래>, <소리사위>, <고시래>에 투영된 시대정신

창무회는 창단 후 3년간 탐구기간을 가진 후 1978년 12월 9일, 10일 양일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개최한다. 이는 창무회 최초의 공식 공연활동으로 기록된다. 전통춤과 창작춤으로 구성되었고, 임학선·임현선·최은희·이노연 등이 출연한 의욕적인 무대였다. 초창기 멤버는 모두 장래가 촉망되는 최고 유망주로 손꼽혔다.

당시 김매자 이화여대 무용과 전임교수는 知와 技로 뭉친 제자들의 단체 결성에 대해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껍질을 깨는 고뇌와 아픔이 없이는 도약의 계기가 없다’는 창무회 초대 회장 임학선의 결연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1978년의 첫 공연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절치부심 끝에 1981년 제2회 공연을 갖는다. 그 중심에 작품 <도르래>가 있다.

어미는/ 잇발로 네/ 배꼽줄을 끊었다/ 끊어도/ 끊고 또 끊어도/ 끊이지 않는 끈이 있어/ 나를 묶고/ 나와 너를 묶고/ 태초를 묶어/ 돈다/ 끝없이 돌아간다/ 봄바람이 영원히 불어간다.(창무회지 창간호, 1983)

작품 <도르래>는 초연 당시 평단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국악 창작음악에 변형된 한복의상을 착용하고 한국춤 고유의 동작을 창조적으로 변용하는 등 전통에 대한 능동적 수용이 돋보였다. 한국춤 언어가 창출된 의미있는 무대로 간주되었고, 무엇보다 우리 춤의 원천을 재구성한 학구적 접근이 높이 평가되었다. 패기 넘치는 20대의 젊은 춤꾼들은 새로운 춤문화운동의 기수이기를 자청했다.

공동창작으로 이루어진 <소리사위>는 단연 현대성이 돋보인다. 현대 도시인이 겪는 일상을 문명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한 작품으로 관심을 모았다. 관습화된 나열식 동작 대신 도시인의 일상을 명징한 몸짓언어로 표현했다. 인쇄기소리, 시계침소리, 기차소리 등 소음에 가까운 음악은 낯선 풍경을 연출했고, 신문지더미에 쓰러져 몸부림치는 등 무용수들이 연출한 예측불허의 즉흥적 몸짓은 충격을 안겨줬다. 현대인의 실존인물로 남성배우를 등장시켜 마임 위주로 상징화한 것도 당시로서는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임학선이 안무한 <고시래> 또한 문제작에 속한다. 돈을 외치는 집단적 함성이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된 현대인의 얄팍한 심성을 고발한다. 탈춤의 취발이춤으로 노동자의 고통을 상징화하여 현실비판 정신을 극대화한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착취와 비착취, 자본가와 노동자 등 무대는 극명한 대립구도로 그려진다. 돈을 상징화한 엽전이 사용되고 재봉틀 작동을 통해 노동의 기계화를 형상화한다.

공교롭게도 <도르래>, <소리사위>, <고시래> 등 세 작품 모두 독일 유학파인 무대미술가  조영래의 참여로 이뤄졌다. 모더니즘이 싹터 나온 유럽 본고장을 관통한 그는 기존 신무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연문법으로 독창적 심미관을 과시했다. 안무자 임학선을 필두로 한 창무회의 초창기 실험작들은 1960년대 이후 모더니즘 예술운동이 전개된 흐름과도 무관치 않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은 1970년대 이후 이른바 ‘우리 것 찾기’를 화두로 한 전통의 현대화 혹은 전통 재해석 작업과 연계되어 뚜렷한 예술적 성취를 남겼다. 근원으로의 회귀를 표방한 전통의 현대화는 궁극적으로 문화원형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굿이나 작법, 탈춤 등 제의식과 마당계열의 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민속현장을 통한 인문적 탐구정신은 한국창작춤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무용의 종식, 한국창작춤의 탄생

주지하다시피, 한국창작춤은 1970년대 중반 출현한 새로운 춤사조로서 신무용과 극명하게 대립된다.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적 관점에서 통찰하는 등 이른바 시대정신을 투영한 한국창작춤의 등장으로 유미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서정적 감성주의, 그리고 자아도취적 심미관에 탐닉된 신무용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978~1981년에 치러진 창무회의 초창기 공연은 신무용의 종말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1년에 개최된 제2회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무용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다운 저돌적이고 당돌한 실험정신,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리고 시대와 호흡하고자 한 열린의식과 치열한 창작정신이 성공의 열쇠라 여겨진다. 궁극적으로 고정관념을 깬 ‘돌이변이’의 몸짓은 ‘새로운 한국무용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공연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엇갈렸다. 평단의 호평과 달리 기성 무용인들은 비판적 논조를 견지했다. ‘국적 없는 미친 지랄춤’으로 매도될 정도로 매서운 비판이 쏟아졌다. 기성세대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낸 한국창작춤은 보다 숙성된 공연미학으로 승화되어 하나의 춤사조로 안착되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창작춤을 주도한 20대의 ‘춤의 전사’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젠 대표적 기성세대이자 60~70대의 ‘젊은 원로세대’ 중심에 서 있다.

‘젊은 원로세대’가 펼친 기억과 회고의 무대 “한국창작춤 1978, 우리는 이렇게”는 조용한 파장을 낳았다. 한국창작춤의 기원을 반추하고 나아가 역사 재발견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울러 오늘날 급변하는 예술환경 속에서 한국춤의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작품 속에서 그 정신이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되묻게 한 값진 무대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