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4월을 연 춤–‘몸쓰다’에 대한 평단의 독특한 시각
[이근수의 무용평론]4월을 연 춤–‘몸쓰다’에 대한 평단의 독특한 시각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6.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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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서 대면 공연이 가능해진 무용계가 4월부터 본격적인 올 시즌을 시작했다.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 ‘한국무용제전’, ‘MODAFE’, ‘대한민국발레축제’ 등 굵직한 시리즈 행사 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국립현대무용단이 기획하고 안애순이 안무한 ‘몸쓰다’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수(ㄱ 4월호), 윤*현(ㄱ 5월호), 김*현(ㄴ 5월호)과 필자(서울문화투데이) 등이 공연을 리뷰하면서 동일 작품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무)의미한 춤의 위험한 알아차림과 떠도는 빙하처럼 표류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음모>란 긴 제목을 가진 김*수 평론가의 마무리 글을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저 명멸하는 빛과 작은 빛들의 조각들 속에서 갈라지고 이동해가는 바닥의 조각판들 위에 마치 떠도는 빙하 위의 어떤 동물들처럼 떠도는 저 (무)의미한 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살아감’의 차원에 있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데카당한 존재라는 사실 또한 엄연해지면서 무척 슬퍼지는 체험 속으로 점점 데려갔다. 우리는 이러한 안무의 세계 속에서 우리 삶의 니힐리즘적인 단계를 현대 세계에 만연한 쾌락주의적 자태를 짓밟으며 만끽하는 공연을 보고 있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할까를 생각하며 3쪽에 걸친 장문의 글을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었다. 여전히 난해했다. 안무(按舞)에서 차용한 듯한 ‘안무(案無, thinking the empty)’란 신조어도 생소했고 제목에 처음 등장하여 글 전편에 13회나 사용된 ‘(무)의미’란 단어의 뜻도 종잡을 수 없었다. “몸과 몸짓들이 무엇인가의 문장을 쓰는 붓이 되는 표현주의적 작업이 전혀 아니고 .... 

시공간 자체가 하나의 주역 혹은 공연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란 문장이 공감할 순 없지만 그나마 모호하지 않은 표현이었다. 의무적인 글을 쓸 때, 컨텐츠가 명확하지 않을 때, 무의미한 사물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때 평론가의 표현은 모호해지고 글은 점점 어려워진다. 공연 전에 안무가를 인터뷰하고(몸 3월호) 누구보다 작품에 근접해 있는 평자가 작품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채 왜 이렇게 난해한 리뷰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순응하는 몸과 저항하는 몸의 사이에서>는 윤*현 평론가가 쓴 글이다. 윤*현은 ‘비보잉 등 힙합 춤의 예술화 가능성’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진지한 학구파다. 

“몸을 써서 소통과 표현의 알갱이를 써내는 작업”이라는 춤 공연에 대한 그의 정의는 신선하다. “몸을 바라본다, 몸이 행동한다, 몸은 상황에 놓여 있다, 몸이 변형되고 있다, 순응하는 몸에서 저항하는 몸을 찾는다”라고 팸플릿에 기록된 안무가의 글에서 그는 ‘저항하는 몸’이란 메시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지켜본 무대엔 도시화된 일상의 움직임, 변형되는 무대장치, 전통춤과 서양춤, 비보잉, 로보틱한 몸놀림 등이 혼재하는 순응하는 몸들만이 산만하게 나열된다. 정작 안무자가 의도했던 저항하는 몸에 대한 알맹이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윤*현의 냉철한 지적이다. 저항하는 몸은 무엇이고 안무가는 왜 저항하는 몸을 찾으려 했는지, 저항하는 몸의 이유와 맥락이 모호해진 것이다. 

공연에 대한 윤*현의 결론은 이렇다. “평온한 일상을 맞는 순응하는 몸의 움직임들이 이어진 세련된 춤 작품인 ’몸쓰다’의 느슨함”‘. 이 결론은 필자의 리뷰나 김*현 평론가의 지적과도 맥이 닿아 있다.   

평론은 소통이다

ㄴ 5월호에 실린 김*현의 글 제목은 <저항하지 않는 춤의 무중력>이다. 김*현은 뉴욕대학(NYU) 예술경영석사를 거쳐 고려대에서 문화컨텐츠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예 평론가다. 

그는 먼저 “무대장치에 의한 시공간의 변형은 독특한 시도지만 시공간의 주체로서의 몸과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단순하고 무질서하고 산만한 동작들만으로 점철”되었음을 지적한다. “관객을 설득하고자 하는 과정 없이 안무가가 설정한 상황만이 나열”된 것이 그 이유일 것이고 결과적으로 “11명 무용수 각자의 몸에서 쏟아내는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 속에서 의미가 변형되거나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의미해졌고 무용수의 몸이 발화되는 감각은 소실”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는 또한 메모된 노트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동작들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음을 토로하면서 “풍성한 텍스트에 비례하지 못하는 빈약한 퍼포먼스”와 “개념미술이나 개념무용이라 불리는 작업들이 가졌던 반성적 의식과 비평적 발화의 부재”를 언급한다. 

’관객의 공감에 선행하는 엘리뜨적 예술관의 한계‘란 부제를 단 필자의 리뷰(서울문화투데이, 2022,5,11)는 작품의 완성도란 면에서는 윤*현과, 개념무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형식 면에서는 김*현의 비평적 시각과 일치했다. 

사족(蛇足)을 단다면 무용전문지인 ㄷ과 ㄹ이 4월과 5월에 각각 10편 이상의 작품을 리뷰하면서 ‘몸쓰다’를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 흥미롭다. 평론은 소통이다. 공연이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라면 리뷰는 평론가가 독자와 직접 소통하는 기능이며 예술가와 관객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란 사실이 망각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