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다.”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다.”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6.1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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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의 춤과 사랑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OOOO OO : “선생님과 제가 아이를 만들면 선생님처럼 머리 좋고 저처럼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나겠죠?” 
버나드 쇼 : “그대 같은 머리에 저 같은 외모를 가진 아이가 나올 수도 있어요.” 

버나드 쇼의 재치 있는 대답에 41살의 사람 좋은 이 여자는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는 성격이 불합리했고, 논리적 사고능력이 모자랐고, 무분별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해서 물의를 빚곤 했다. 그는 지적으로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한 남루한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삶을 사랑했고, 본능에 충실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순수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버나드 쇼는 말했다. “그를 우리 시대 최고 예술가 반열에 두는 데 한치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이시스의 선물’, 곧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이었다. 

그는 춤을 발레의 규범에서 해방시켜 ‘현대 무용의 어머니’가 됐다. 그는 고향 샌프란시스코에서 발레 학교에 처음 갔을 때를 회고한다. 선생님이 “발가락 끝으로 서 보라”고 지시하자 어린 이사도라는 당돌하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하죠?” 선생님은 대답했다. “아름다우니까.” 이사도라는 되받았다. “그건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흉해요.” 그는 세 차례 레슨을 받은 뒤 교습을 그만두었다. 그가 평생 받은 무용 교육의 전부였다. 마린스키의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목격한 이사도라는 탄식했다. “어린 학생들이 몇 시간 동안 줄을 지어서 발가락 끝으로 서 있었는데, 잔인하고 불필요한 종교재판의 희생자들 같았다. 무용실은 고문실 같았다.” 

발레는 명백히 18세기의 유물이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열연한 <지젤>을 보고 그는 적절한 존경을 표한 뒤 덧붙였다. “그는 강철과 용수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순교자의 준엄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모든 동작은 마음에서 완전히 분리된 체조 동작 같았다.” 이에 대해 안나 파블로바는 담담히 응답했다. “이사도라는 춤추기 위해 살지만 저는 살기 위해 춤추지요.” 

춤에 대한 이사도라의 소신은 확고했다. 춤은 음악처럼 자연스레 영혼에서 흘러나와야 했다. 1924년 그의 춤을 본 사람의 증언이다. “그는 음악에만 귀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춤을 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그는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음악의 정수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평생 세 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 니체, 바그너…. 음악 자체에 자신을 완전히 매몰시켜 춤추는 것, 그것은 디오니소스의 춤이다. 춤의 기운을 심사숙고하면서 하나의 이야기에 맞추어서 춤추는 것, 그것은 아폴론의 춤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디오니소스의 춤이었다. 춤은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모든 것들의 맥박이었다. 춤은 무한히 반복하여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그는 영혼의 힘만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쇼팽이 음악으로 인간의 영혼을 포착하여 눈물짓게 했다면 이사도라는 장엄한 침묵 속에 실재하는 음악의 혼을 자신의 몸으로 살려냈다. 

쇼팽이나 요한 슈트라우스의 춤곡을 무용에 사용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베토벤의 교향곡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슬린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근엄한 음악 애호가들은 그가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에 맞춰서 춤추는 그를 본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말했다. “그는 초대받지 않은 음악으로 자신을 속여서 판다. 하지만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은 그의 동행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사도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 몸이 음악의 신성한 조화를 표현하는 도구 이외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그는 독일, 프랑스, 소련을 오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훗날 ‘이사도라블’(Isadorables)이란 애칭으로 불린 제자들에게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오직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기 바란다. 음악 자체가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절대 잊지 말아라.” 예술은 테크닉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돼야 했다. 자연스런 몸짓이란, 평범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한 트레이닝 없이도 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뽑을 때 자연스런 마음과 훈련받지 않은 몸을 원했다. “나의 학교는 춤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학교가 될 것입니다. 어린 소녀들에게 기성의 몸짓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만의 몸짓을 만들어 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