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 윤중강 평론가 “평론 데뷔 38년차, 나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Culture Interview] 윤중강 평론가 “평론 데뷔 38년차, 나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 승인 2022.06.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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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시작된 ‘뮤지컬레터’…장르 아우르며 100회 이상 연재
누군가에게 명쾌한 답 내려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자체로 행복
“내가 사랑한 1930년대, 암울했지만 이념·사상 자유로운 문화 융성 시기”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김재성 사진기자]“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배우 고(故) 임성민(왼쪽)과 장미희 주연의 영화 ‘사의 찬미’(1991)의 한 장면
▲배우 고(故) 임성민(왼쪽)과 장미희 주연의 영화 ‘사의 찬미’(1991)의 한 장면

헝가리의 민족 작곡가 ‘다뉴브강의 잔물결(Donau Wellen Walzer)’이라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Josif Ivanovici)의 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사(死)의 찬미’의 첫 소절이다. ‘사의 찬미’를 부른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은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발 관부연락선에서 사랑하는 연인 김우진과 바다로 몸을 던졌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틱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영화,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창작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 속 윤심덕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주는 우울에 갇혀 있거나, 사랑만을 갈구하는 지고지순한 여성의 면모가 부각됐다. 

한국의 1930년대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평론가 윤중강은 이를 두고, ‘정사설’ 혹은 ‘타살설’에 대한 연연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윤 평론가가 1930년대를 바라보는 시각과도 상통한다.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였지만, 억압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과 소박한 희망을 품고 살았을 것이란 관점이다. 아주 진지한 것과 가벼운 것이 공존하고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지던 시기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문화적으로 융성했고, 윤 평론가는 그 점을 주목한다. 

서울대 국악과와 일본 도쿄예술대 대학원 음악연구과를 졸업한 윤중강 평론가는 지난 1985년 제1회 객석 예술평론상을 받으며 평론가로 데뷔해, 올해 평론가로서 37주년을 맞았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윤중강 평론가 ⓒ김재성 사진기자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윤중강 평론가 ⓒ김재성 사진기자

윤 평론가의 SNS에서 게시물 2~3개에 하나씩 등장하는 사진이 있다. 바로 KTX 예매 내역서다. 어제는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예술감독으로 일하다가 오늘은 대전시립연정국악원에서 해설자로 무대에 서고, 내일은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며 매일 바쁘게 전국을 누빈다. 각지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작품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다. 

윤중강의 관심사는 1930년대의 축소판이자 확장판이다. 국악뿐만 아니라 가요, 민요, 클래식, 재즈, 연극, 뮤지컬,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지난 2015년 11월부터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기고하고 있는 ‘뮤지컬레터’는 어느새 100회를 넘겼지만, 아직도 그는 할 말이 많다.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지식, 예리함이 모두 담긴 시선이 이번엔 누구를 위한 편지를 써내려갈까? 여름이 다가오던 6월의 어느 날, 본지 사무실에서 윤 평론가를 만나 그가 가져온 국악과 음악, 그리고 예술의 보따리를 함께 풀어봤다.

지난 2015년 1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윤중강의 뮤지컬레터’라는 타이틀로 첫 칼럼 연재를 시작해, 어느덧 100회가 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간의 소회가 궁금하다.

2015년 당시, 대한민국 뮤지컬 시장 특히 소극장과 중극장 뮤지컬 시장에서 많은 가능성을 봤기에 ‘뮤지컬레터’가 시작될 수 있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가 소극장 뮤지컬의 부흥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다소 정체된 감이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보단, 몇몇 배우의 유명세에 기대 흥행만을 목적으로 하려는 모습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물론 이후에도 좋은 작품들은 있었지만,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에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이야기하는 글을 쓰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100회가 넘는 글을 써오면서, 매번 ‘뮤지컬’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나의 글 속엔 언제나 뮤지컬이 있었다. 과거의 공연과 현재의 뮤지컬 외의 영역을 함께 다루는 나의 글들이, 이 시대의 ‘뮤지컬’에 보내는 ‘레터’이다.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관심은 앞으로의 뮤지컬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윤중강 평론가 ⓒ김재성 사진기자

좀 더 포괄적인 타이틀로 바꿔볼 생각은 없는지?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글에서 드러나듯 국악, 연극, 무용,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것이 내가 가진 장점이다. 많은 경우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남아있는 기록과 자료를 편집해서 글을 작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오류가 굉장히 많다. 이를 바로잡는 것도 내 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윤중강의 바로잡기’ 같은 타이틀로 바꿀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너무 공격적이라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웃음) 

첫 번째 ‘뮤지컬레터’ 썼을 때가 기억나는가?

당연히 기억난다. 뮤지컬 <명동로망스>의 전혜린에게 첫 편지를 썼다. 본격적으로 평론가의 길로 들어섰을 당시부터, 모두가 어떤 현상 자체에 대해 연구했다면 나는 그것과 관련된 신문 기사나 역사에 더욱 주목했다. 과거 기사들을 연구하고 그것이 축적될수록 1930년대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졌다. 

평론가라는 이름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그 당시 저널리스트들은 지식과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었다. 음악을 다루지만 음악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제반 지식을 꿰뚫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넓은 시각을 가진 그들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낭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혜린’이었다.

뮤지컬을 시작으로 연극, 창극, 오페라, 국악, 무용 등 공연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아우르며, 이에 대한 날카로운 평론으로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작품을 선정하는 본인만의 기준이 있다면?

부풀려진 것을 부풀려지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인 것 같다. ‘사실은 그게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목적 중 하나이다. 일례로 ‘지하철 1호선’에 보낸 뮤지컬레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때 한국 뮤지컬계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큰 흥행을 거뒀다. 공연 횟수만 해도 이미 2008년 4,000회를 넘어섰고, 수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이 작품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지하철 1호선’을 관객들이 계속 봐야할 이유를 나는 찾지 못했다. 시대상을 반영한 가사들로 공감을 얻었으나, 그마저도 2000년대 들어서는 ‘1990년대를 담은 이야기’로 정착했다. 예술가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방의 공연을 가능한 한 자주 소개하려 한다. 서울에서 많은 지원과 거대한 인프라로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드는데, 지방에서는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런 작품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고 경각심을 갖게 하고 싶다. 그래서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대표로부터 추천받은 강원도립극단 ‘월화’가 더욱 마음에 박혔던 것 같다. 

<월화 – 신극, 달빛에 물들다>라는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꼭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예상했던 대로 윤 평론가의 취향을 저격했기에 덩달아 뿌듯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월화’는 사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평소 관심이 많던 주제들의 총집합이기 때문이다. 근대 시대 무대에 올랐던 배우의 이야기, 거기에 국악기를 활용한 음악이 더해진 작품이다. 미리 알고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극 안에 녹아있는 모든 요소들이 내 취향에 부합했다. 특히 이정표 음악감독의 가야금 활용은, 근대를 다룬 작품에서 당시의 시대성과 예술성, 객관성과 대중성을 생각할 때, “어떤 음악을 선곡해야 하고, 이것을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모범 답안이 될 만 했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공연 모습(사진=강원도립극단)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공연 모습(사진=강원도립극단)

가장 최근의 글 ‘정구호를 걱정하다’의 경우, 오랜 시간 쌓인 통찰력이 돋보이는 비평이었다.

정구호의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 시대의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 감각이 전통예술 혹은 한국적인 미학과 얼만큼 연관이 있나 싶다. 전통예술을 모르는 이들을 극장으로 이끄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연 ‘한국 무용의 혁명’이라 불려 마땅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선보이는 감성과 스타일을 철학과 미학으로 혼동해선 안 되지 않나. 미학적 부분에 치중해, 무용 작품의 본질을 지우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정구호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의 작업이 ‘전통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계속 응용’하는 작업이라고 확신하는 점이다. 그 자신은 그렇게 할지 모르나. 전통의 본질을 오래도록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레벨이 너무도 높지 않은 게 유감이다. 

배색 효과를 통해 시각적 강렬함을 객석에 전달하지만, 이의 근간이 되어야 할 미학이 매우 약하다. 전통에 대한 숙고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결합하는 ‘자기 주도적’ 방식이 약하다. 앞으로 어느 단체가 정구호에게 작품을 계속 의뢰한다면, 또한 정구호가 앞으로 이런 경향의 작품을 계속 만든다고 한다면, 이 지점에서 심히 고민하길 진심으로 권하는 바이다.

평론가이지만, 역설적으로 평론가가 비판해야 되는 연출가이기도 하다. 2017년에는 문화기획 부문에서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화기획 및 연출가 그리고 평론가. 상반되는 부분이 분명 있을 텐데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

일반적으로 평론은 뭔가가 만들어진 이후의 것에 대해 말하고, 기획은 만들어지기 이전에 말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기획부터 평론까지 전부 한 사람의 몫이었다. 기획하고 대본도 쓰고 연출, 홍보 심지어 출연까지 했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전방위적 인물을 꿈꿨던 것이 사실이다. 

2004년과 2005년 ‘국악 축전’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뛰어난 아티스트들을 다양하게 발굴했고, 이것이 최근의 국악 페스티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한다. 연출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이제는 이름 옆에 연출가라는 직함은 빼야할 것 같다.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배우와 작품에 온전히 몰두해야 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더불어, 아티스틱 디렉터의 역할 외에 테크니컬 디렉터의 역할 소화에 부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식과 해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한데, 이것이 무대 위에서 구현되기까지는 고려되어야 할 부분들이 훨씬 많기에 이 간극을 좁히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더라. 

평생 남을 비판하며 살아왔는데, 4~5년 전만 해도 남이 나를 비판하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대가 본 것은 나의 일부라고 혹은 나를 비판적으로 보는 그 시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과거에 비해 수용할 수 있는, 나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생겼다. 환갑이 지나면서 내 단점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많이 열린 자세가 됐다. 

연출가이자 기획자, 평론가, 사회자 등 1인 다역을 하고 있는데, 현재의 윤중강에게 가장 비중이 있는 부분을 꼽는다면?

우선순위를 매기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1번은 평론인 것 같다. 38년 차 평론가이지만 글을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 아직도 노력한다. 매일 어떤 주제로든 하나를 평론해보자는 나와의 약속을 했고, 1일 1평론을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 쓴 글이 훗날 비난을 받을지 몰라도 일단은 써보자는 마음이다. 

2번은 사회자로서의 윤중강을 꼽겠다. 다만 좀 달라진 부분이 있다. 예전에 사회를 볼 땐, 내가 그런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늘 갖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의 목적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국악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을 스스로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사회자가 아닌 해설자라고 생각한다. 단순 진행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청중에게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사실 클래식에서는 이미 이런 롤의 사람들이 많은데 국악은 아직이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국악계의 송해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이자 꿈이다. 이건 사실 우리 어머니의 소원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엄청난 대중성을 얻진 못하더라도, 현장성을 갖추고 싶다. 

이전부터 꾸준히 ‘국악의 대중화’를 주창해왔다. 과거와 비교해 국악은 얼마나 대중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 듣고 싶다.

언제나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는 ‘대중화’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1930년대에도 ‘조선 음악의 대중화’라는 말이 있었으니 말이다. 국악의 대중화라는 범주에 나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2004년부터 내가 주장했던 건 ‘국악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음악의 국악화’였다. 이를 제대로 구현해 대중의 큰 관심을 얻게 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JTBC ‘풍류대장’이 아닐까 싶다. ‘국악의 대중화’를 목표에 두고 방송사가 중심이 된 프로그램이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시기의 이벤트로 끝이 났고, 뚜렷한 음악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풍류대장은 좀 달랐다. 방송에서 공연까지, 풍류대장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한국음악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만하다. 

내가 예술감독을 맡았던, 2004년과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당시, 한국문예진흥원)에서 주최한 국악축전은 풍류대장과 같은 결로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국악축전의 전략은 앞서 말한 ‘대중음악의 국악화’였다. 당시로선 ‘유명 대중 가수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출연해서, 자신의 대표곡과 국악곡을 동시에 불렀다. 국악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편곡이었다. 이런 가요와 가수의 힘을 빌려서, 국악의 맛과 멋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지금은 텔레비전 가요프로그램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지만, 2000년대 초중반으로선 매우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이와 달리 풍류대장은 대중음악의 국악화를 가수가 아닌 젊은 국악인이 이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한다. 풍류대장과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국악인들이 국악의 대중화를 넘어 국악의 세계화, 한국음악의 글로벌화에 기여해 주길 바란다. 

현재 국악계의 큰 이슈가 국악의 교과 편입문제이다. 이에 대한 견해를 묻고 싶다.

서울대 국악과 재학 당시,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계속 이론 공부를 이어나가며 이론가로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저널리즘 쪽으로 나갈 것인지 고민했다. 교육보단 방송 쪽이 나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고, 이후 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국악 교육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흩어져있는 산발적 교육 방식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마다, 지역마다, 가르치는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교육과 학설을 전한다면 그 안에서도 의견을 모으는 것이 어려워 질 수밖에 없고 집단의 공통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더뎌질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국악도 소리와 기악, 연희 등 그 장르를 구분해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물놀이, 탈춤 등 연희의 경우 세대교체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 흐름을 기성세대 원로들이 응원하고 지지해준다면 국악과 연희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한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윤중강 평론가 ⓒ김재성 사진기자

최근 이매방 선생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 등 우리 전통문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무형문화재 부분이다. 무형문화재 위원이기도 한데, 젊은 예술인들은 특히 제도 개선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를 보존해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62년 만들어졌다. 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문화재 보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무형문화재의 경우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사양산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형문화재 종목들이 소멸될 위기에서 벗어나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만큼, 문화재보호법 특히 무형문화재 관련 법안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것이 아니라 종목별 지정을 해야 한다. 지금의 제도는 특정 소수 보유자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폐단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종목에 더 치중하고 인간문화재를 없애거나, 대폭 늘려 그것이 권력이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 혹은 목표가 무엇인지?

부족한 스토리텔링 실력이지만, 나의 지식과 다양한 콘텐츠들을 바탕으로 ‘근대 여성사’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 여성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부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인까지 포함된다. 

1930년대에 태어나 결혼을 4번이나 한 우리 외할머니와 좋은 선생님이었지만 나에겐 신경질적이었던 엄마. 이 두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말을 하고 글을 쓰게 만든 밑거름이 되어 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던 왕수복이라는 성악가이자 기생,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도 잘 알려진 명창 박록주의 삶,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소프라노 윤심덕 미스테리의 진실 등 다양한 근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 

이 시점에 윤중강이 꿈꾸는 것을 말한다면 ?

사소하게는 공연을 볼 때부터, 크게는 어떤 정책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어떤 딜레마에 빠졌을 때 ‘윤중강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윤중강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의 생각을, 견해를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많은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명쾌한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