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홍상문 작가 “삼라만상 피조물이 가진 아름다움, 창작의 근원”
[Special interview] 홍상문 작가 “삼라만상 피조물이 가진 아름다움, 창작의 근원”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 승인 2022.06.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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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름다움을 더욱 발하게 하는 암채(巖彩)
한일현대미술작가회, 국경을 넘은 다양한 예술인들의 조우
천경자 화백의 애제자, 재료적 기법‧작품 세계 가르침 받아
눈(眼)에 그려둔 피조물의 생동감이 작품 소재
손녀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진솔함’ 담은 그림 지향
오는 8월 13일 말박물관서, 《홍상문의 말 그림 전》 개최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홍상문 작가의 작업실은 신촌동 언덕배기쯤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가 싶을 정도로 자연의 정취가 어우러진 곳이다. 홍 작가의 작업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천장에 나있는 가로로 긴 천창이다. 채색화를 하는 그에게 자연광은 필수적인 요소다. 이달 초, 홍 작가 작업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동안에는 동네를 오가는 길고양이 얌전이(홍 작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가 작업실에 들어왔다 나가기도 했다. 아주 맑은 색감으로 자연을 자신의 화폭으로 옮겨놓는 홍 작가의 정서가 가득 담긴 작업실이었다.

▲전시 도록을 보면서 한일현대미술작가회 전시를 설명하는 홍상문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전시 도록을 보면서 한일현대미술작가회 전시를 설명하는 홍상문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동양화전공) 및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홍 작가는 천경자 화백의 애제자였다. 2017년 다시 불거진 ‘천경자 화백 위작 사건’에서 진술인으로 나서서 천 화백 생전 색채에 대한 강조점과 재료에 대한 교육, 작업 과정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 인터뷰에선 천 화백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홍 작가는 인터뷰를 하며 천 화백을 ‘천 쌤’이라고 칭했는데, “내가 좀 그런 부분이 있지 않느냐잉”이라는 식으로 천 화백의 화법을 구현할 때는 마치 홍 작가와 함께 천 화백의 강의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홍 작가는 월전 장우성, 천경자, 박생광 작가 슬하에서 수학하며 채색화를 공부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은 “홍상문의 작품은 ‘문인정신이 가미된 정갈한 채색화’로, 기본기를 중시하고, 탄탄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그림에서 섬세한 묘사와 견고한 조형미를 추구한다”라며 “일상에서 소소하게 느낀 자신의 심의(心意)를 담백하게 표현하는 문인 정신을 잃지 않는다”라고 평한 바 있다.

‘문인화적 채색화’라는 최 평론가의 명명은 그의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맑은 색채로 표현해 낸 삼라만상의 자연물들은 과하지 않게 각자의 자리에서 고유한 빛깔을 드러낸다. 홍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올해 작업한 <백모란>에 대한 일화를 정겹게 풀어냈다. 흐드러지게 핀 백모란을 그린 그 작품은 작업실 옆에 마련된 작은 정원에서 손주들과 함께 했던 스케치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손주들이 사용하던 스케치북과 수채물감이 그의 스케치 재료였다. 그의 작업 방식 조차,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정서와 세계관을 담고 있는 듯 했다. 홍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자연과 동물을 화폭으로 옮겨 자신의 창작관을 전하는 작가다. 그가 사랑하는 세계와 관계에 대한 시선은 담백하면서도, 올곧고, 그만의 특유의 정서가 담뿍 담겨있다.

▲홍상문, 백모란 53x45.5cm 한지에 암채, 2022/ (우측 사진) 홍상문 작가가 손주들과 함화실 정원에서 사생을 하고 있다. 이 때의 스케치가 '백모란' 작품으로 완성됐다 (사진=홍상문 제공)
▲홍상문, 백모란 53x45.5cm 한지에 암채, 2022/ (우측 사진) 홍상문 작가가 손주들과 함화실 정원에서 사생을 하고 있다. 이 때의 스케치가 '백모란' 작품으로 완성됐다 (사진=홍상문 제공)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수묵이 아닌 채색화를 택했고, 암채 기법을 고수하고 있다. 암채기법만이 가진 정서가 있다면.

암채 기법을 택하게 된 것은 스승인 천경자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암채’는 돌, 보석 종류를 간 가루가 재료다. 자수정, 다이아몬드, 호완석도 모두 암채가 될 수 있다. 돌, 보석은 분쇄한다고 해도 그 가루 같은 입자가 모두 다각면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 암채가 화폭 위에 올라가서 빛을 받으면 불규칙한 난반사를 이뤄내면서 시각적인 다채로움을 만들어낸다. 모든 존재와 예술 작품들은 빛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암채는 그 빛의 힘을 더욱 여실히 드러내는 재료다.

유성물감에 비해서 암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도 있다. 유화는 오일컬러를 사용해 작업하다보니, 완성작이 후덥지근해 보이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암채의 경우 수채화가 아님에도 굉장히 맑은 느낌을 자아낸다. 암채는 혼색이 안 되는 특징이 있다. 나는 이 점을 인상주의 점묘법과 비슷하다고 본다. 아주 작은 점을 찍어서 자연의 빛깔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작업이, 혼색이 안 되는 암채가 고유의 빛깔을 내며 어우러지는 현상과 같다고 본다. 혼색을 한다 해도 고유의 색깔들이 각각 살아있고 생동하면서, 맑게 어우러지는 것이 암채의 특징인 듯하다.

홍 화백의 작품은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하다. 최광진 미술평론가는 홍 작가 작품세계에 대해 ‘문인정신이 가미된 정갈한 채색화’라고 칭하기도 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듣고 싶다.

유년기를 지금의 정릉인 산촌에서 보냈다. 그 곳에서 계절과 자연의 변화, 그 면모를 체감하는 생활을 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의 자양분을 얻었다. 자연물과 생명력을 지닌 존재에 대한 관심은 유년기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내 본격적인 작품 세계는 천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천 선생님은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은 굉장히 싫어했다. 사진은 하나의 독립된 장르의 완성이고, 완성은 곧 죽음이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매번 “죽은 걸 보고 그리는 데 어떻게 생동감을 찾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살아있는 것을 눈앞에 두고 크로키를 하면서 작품을 할 순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점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천 선생님은 “계속 움직이는 것을 언제 다 스케치 하니, 눈에다 그려, 눈으로 인화해”라며 답을 줬다. 그때부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아주 예민하게 관찰하고, 눈 안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생동감은 실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내 작품들의 근간은 ‘삼라만상 피조물의 경이로움에서 출발한 조형미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손녀들과 사생을 다니면서 함께 스케치를 하곤 한다. 그 때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과 존재들의 아름다움에 매번 감탄한다. 피조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인상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때가 있다. 학생 시절 사생을 다니면서, 남산 동물원에 간 때였다. 동물원 연못에 원앙무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저 생명체들을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일까’하면서 감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원 마칠 때쯤 종교를 갖게 돼, 비교적 늦게 종교를 가진 편이다. 남산 공원에서 그 경험을 한 때엔 아직 종교가 없을 때였는데 종교를 가진 이후, 피조물의 가치로움에 더욱 빠져들게 됐다. 달맞이꽃은 달맞이꽃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가지, 고추, 수박도 다 개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들이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고, 이처럼 세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는가에 대해 바라보면 경이로움이 온 몸을 감싼다. 그 감정적 충만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가 내 작품 안으로 녹아든다.

피조물의 아름다움, 경이를 표현할 때 단순히 재현을 하는 데에 머무르진 않는다. 내 스승인 월전 장우성 화백은 “작품을 작품 명제로 설명하려고 하지 마라, 작품은 명제 없이도 작품으로서 설명돼야 한다. 그게 전달 돼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줬다. 작품을 하는 데에 있어 피조물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로 재구성해 표현하고자 한다. 아마, 이런 시도가 내 작품만의 정서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홍상문, 사계의 창 91x91cm  한지에 암채, 2021 (사진=홍상문 제공)
▲홍상문, 사계의 창 91x91cm 한지에 암채, 2021 (사진=홍상문 제공)

천경자 화백이 스승이었다. 2017년 천경자 화백 위작 사건에도 참여해 진술했었는데, 현재 사건 진행은 어떤 상황인가.

‘천경자 화백 위작 사건’은 대한민국의 검찰의 어두운 면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본다.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소가 전한 ‘위작’이라는 결과까지 검찰이 뒤집으면서, 국내외적으로 대한민국 검사, 검찰의 위상을 떨어뜨렸다. 현재 사건은 대법원에 민사소송 건으로 상고 돼 있는데, 계속 계류하고 있는 상황으로 알고 있다. 위작 논란 이후, 천 화백과 그 모든 고통과 속앓이를 함께한 둘째 딸 김정희씨가 한이 맺힌 상태다.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에서 천 선생님의 담배를 피고 있는 여인 소품(小品)을 보게 됐다. 오랜만에 천 선생님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그 작품을 보는 순간에 <미인도>는 위작일 수밖에 없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정말 평범한 대중이 본다하더라도, 천 선생님의 진품과 위작은 작품의 아우라가 다르다. ‘천경자 화백 위작 사건’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성숙해질수록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홍상문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천경자 화백은 홍 작가에게 어떤 스승이었나.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다면.

천 선생님은 본인이 좋으면, 그냥 좋은 분이었다. 실기 강의 4시간 동안, 내 책상에 앉아서 줄곧 나와 대화만 하다가 강의를 끝낸 적도 있었다. 천 선생님 아래에서 수학을 한 건 1년이란 시간뿐이다. 정말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낸 듯하다.

사실 내가 입학한 해 1년이 조금 독특한 해였다. 천 선생님은 내가 입학하기 2년 전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학교를 떠났다가, 내가 입학한 해에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 학년을 가르치기 전까지 천 선생님의 강의 방식이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갑작스레 학교를 떠나면서 제자들을 남기고 간 것에 대한 미안함과 강사로 자신을 복직시킨 학교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감정이 얽힌 가운데서 그런 강의를 해줬던 것 같다.

내게는 월전 장우성 화백, 천경자 화백, 박생광 화백까지 좋은 스승들이 정말 많았다. 그 분들이 내게 준 가르침은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천 선생님은 내게 ‘작가적 기질’에 대해서 알려준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천 선생님이 쓰신 글 중에 “그림이 잘되는 날은 그림 잘 풀려서 잠을 못자고, 그림이 안 풀리면 안 풀려서 잠을 못 잔다”라는 문장이 있다. 천 선생님이 가진 기질을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천 선생님은 굉장히 고지식한 강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스승이었다. 그 당시에는 출석만 부르고 나가는 교수들도 허다했다. 하지만 천 선생님은 강의 시간을 꽉꽉 채웠고, 마치는 시간까지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천 선생님에게선 재료적 기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천 선생님은 ‘특별히 어디가 잘못됐다’라고 콕 짚어서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림에서 잘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면 말없이 곁에 와서 평붓으로 휙- 색을 발라버리곤 했다. 천 선생님이 그렇게 하고나면, 이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던 구도가 보이고, 색의 대비감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천 선생님의 방식이었다.

천 화백은 홍 작가의 어떤 지점을 귀하게 여겼던 걸까. 동기 간에 시기, 질투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한 번은 천 선생님이 내 작품을 보고 “상문아 너는 색채가 너무 건강해”라면서 칭찬을 했는데, 바로 옆 학생에겐 “너는 색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냐”라고 나무라서 강의시간에 앉아있는 것도 곤혹스러운 때가 있긴 했다. 천 선생님은 사람을 좋아하면, 마냥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정말 열심히 그렸다. 정말 그뿐인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 선생님만의 가르침을 내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좋게 봐줬던 것 같기도 하다.

▲홍상문, 환상, 젊은날의 초상  60x135cm 한지에 암채, 2017
▲홍상문, 환상, 젊은날의 초상 60x135cm 한지에 암채, 2017  (사진=홍상문 제공)

한일현대미술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한일현대미술작가들과 함께 6개국의 작가가 참여한 《G6 서울전: 감각의 합일로》 기획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어려움은 없었는가.

《G6 서울전: 감각의 합일로》 전시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명 미술관 운영하면서 관장이기도 한 로베르타 피오리니가 동료이면서 친구이기도 한 일본 작가 오자키 미야에게 제안을 하면서 성사된 전시다. 2016년부터 G6 전시 기획진은 이탈리아, 영국, 홍콩에서 비정기적으로 전시를 열어왔다. 그 과정에서, 로베르타 피오리니가 서울에서도 전시를 열어보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지난해 《G6 서울전》이 개최될 수 있었다.

전시를 기획할 때 마침 이음 갤러리에서 국제전 지원사업이 열려서, 공모에 당선돼 24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기획하게 됐다. 6개국의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인 만큼, 작가들이 한국에 방문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중국, 프랑스 국적 작가들의 항공료와 체제비에 지원금을 다 투자했다. 그게 지난해 6월이었다. 그때 전시를 기획하면서 12월이 되면 코로나19 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코로나19 상황이 12월에 더욱 심해졌다. 해외 작가들은 아무도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고, 지원금 1000만 원은 그대로 반납한 일화가 있다. 지원금보다도, 서울에서 전시를 원한 유럽권의 유명 작가들을 모두 초대했는데 그들을 한국에서 만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이었다.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하고 있는 홍상문 작가 ⓒ김재성 사진 기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근간에는 양국의 관계가 좋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2005년 이후로 꾸준하게 교류전을 펼치고 있다. 작가회를 운영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는가.

한일현대미술작가회는 2005년에 외교통상부에서 이해관계가 없는 단체끼리의 교류가 있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4번 정도 개최하면서 알게 된 인연들과 함께 작가회를 시작하게 됐다. 지금은 양국의 작가 각각 32명이 함께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화는 실례라고 본다. 또한, 예술가의 지위 역시 한국과는 좀 다른 지점이 있다. 일본 예술가들은 정치가나 행정가들보다 자신들의 지위가 더 우월하다고 느끼고, 그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다. 그래서 일본 내부에서는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작가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일본에서 그런 입장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문제는 없다.

다만, 한일현대미술작가회에서는 암묵적으로 정치적 테마가 주제가 된 작품은 출품하지 않는다. 특별히 협약한 것은 없으나,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양해를 구하는 지점인 것 같다. 우리 한국 작가 회원들 중에는 ‘독도’를 작업한 작가도 많이 있는데, 한일현대미술작가회 정기전에 굳이 ‘독도’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 것 정도의 합의 인 것 같다.

한‧일 작가들의 교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한‧일 작가들은 비슷한 듯 다른 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정기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각국에서 전시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일본에선 이 자리를 ‘반성회’라고 칭하고, 한국에선 ‘평가회’라고 칭한다. 명칭에서부터 각국의 다른 정서가 느껴지는 지점인 것 같다.(웃음)

양국의 작가들이 함께 전시를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얻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소회지만, 2005년에 협회를 결성하고 전시를 열기 시작하면서 일본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로움’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보다 국가적, 사회적 질곡을 덜 겪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선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돋보였다.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만약 우리 한국 작가들도 굴곡의 역사를 겪지 않고 자유로운 환경을 겪고 자라났다면 저런 정서를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또한, 전시회를 통해 양국의 사건들을 다시 짚어볼 수 있는 것 같다.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이 일어난 해에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전시를 통해 양국의 현재의 감정을 교류하고 느껴볼 수 있는 듯 하다.

▲홍상문, 사랑 43x43cm 한지에 암채
▲홍상문, 사랑 43x43cm 한지에 암채  (사진=홍상문 제공)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전시나 작품이 있다면.

최근 ‘사계의 창’이라는 주제로 연작 작업을 해오고 있다. 화면을 4개의 창으로 나누어, 한 풍경의 사계절 모습을 담는다. 현실에 실제 존재할 수는 없는 풍경이지만, 나는 실제 존재하는 풍경을 토대로 작업을 완성한다. 지금 논의 사계절, 여주 깔딱고개의 사계절을 담은 작업 등 4개의 작품을 진행했다.

‘사계의 창’ 작품의 밑바탕 역시 피조물에 대한 관심, 자연물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여주 깔딱고개 작업에는 내가 봤던 창덕궁 후문 길가에 있던 바위, 다른 어떤 곳에서 봤던 여름의 소나무, 겨울의 설원들이 어우러져 있다. 앞으로 이 ‘사계의 창’ 작업을 통해 이 세계의 계절의 아름다움을 내 시각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다.

가장 근간에 앞두고 있는 전시는 오는 8월 13일에 시작하는 《2022 한국마사회 말박물관 초대작가전》이다. 말을 주제로 한 전시라고 해서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다른 동물들보다도 ‘말’을 봤을 때 경이로움을 많이 느낀다. 독보적인 조형미와 선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느낀다. 전시에서는 말 그림 20여 점과 함께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베트남과 미국에서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베트남 전시는 내년 하반기쯤 할 예정으로 추진하고 있다.

▲홍상문, 아침 58x29cm 선면에 수묵담채
▲홍상문, 아침 58x29cm 선면에 수묵담채, 2022 / 이 작품은 이번 '2022 한국마사회 말박물관 초대작가전'에 출품될 예정이다.  (사진=홍상문 제공)

최근 본지 기획기사 “새정부 문화정책 진단과 해법”에서 현 정부 장애 예술인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사실 장애 예술인 관련 의견을 묻는 인터뷰 질문에 많이 놀라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작가 홍상문’으로 살아왔지, ‘장애예술가 홍상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인터뷰에서도 ‘장애 예술인’에 초점이 맞춰져 인터뷰가 진행될까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 번은 KBS 인간극장에서 촬영을 함께하자고 제안이 왔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들이 원하는 프레임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장애인 문제라는 것은 정말 다양한 견해가 섞여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문제, 정치권 문제가 정말 크다. 당시 기획 기사 인터뷰 때도 언급했지만, 한 정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그런 야만적인 발언을 한다는 것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분노를 일게 했다. 그 때 같은 당의 김예지 의원이 시위 현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한번 미국에서 한국 작가 10인 초대전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한국사회가 익숙했던 나는 그들의 태도에 되레 불편함까지 느꼈던 때다. 미국 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였다. 버스에 휠체어를 탄 승객이 있었는데, 그 승객이 내릴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때 버스 운전기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서 그 승객의 하차를 돕고, 심지어 그 승객의 휠체어를 밀어 횡단보도까지 함께 건넜다.

그 과정을 보면서 나는 제일 먼저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을 돌아봤다. 갑자기 운전기사가 운전석을 이탈해 횡단보도까지 건넜는데,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승객들 아무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일상이었고, 정말 아무 일 없이 운전기사는 버스로 돌아와서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때가 1989년도였다. 그 버스가 지나는 곳이 미국 상류층의 동네도 아니었다. 내게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장애인관련 문제는 정말 쉽지 않다. 장애인들 내부의 문제도 존재한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우리 사회가 함께 나아가야 할 지점은 조금 더 가슴을 열고 서로를 마주보고, 인간애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터뷰 중 생각에 잠긴 홍상문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어떤 작가로 나아가고 싶은가.

‘진솔한 작가’로 살아가고, 나아가고 싶다. 지금까지 꾸밈없이 살아왔다. 앞으로도 꾸밈없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항상 화면을 구성하면서 우리 손녀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자 노력한다. 난해하지 않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전하면서, 내가 추구하고 있는 세계의 울림을 전달하는 작품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