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Ⅱ
  • 윤진섭(미술평론가)
  • 승인 2022.06.15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1950년대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현대미협과 악뛰엘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닌 까닭에 이 점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이 글의 주제인 70-80년대로 넘어간다.

Ⅲ.

한국 현대미술사상, 본격적인 전위미술의 출발을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의 발족으로 보는 미술사학계의 시각은 보편적이다. 이 협회가 전시회를 열고 안국동에 있는 이봉상미술연구소를 중심으로 교류를 하던 시점(1957)에 방근택은 문학평론가인 이어령과의 만남에 이어 화가인 박서보와 이수헌 등을 다시 만났다. 이 만남은 방근택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인연으로 인하여 방근택은 미술평론가로 데뷔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박서보의 도움이 컸다. 박서보는 1958년 2월에 방근택이 쓴 <조르쥬 루오의 생애와 예술>이란 글을 연합신문에 싣도록 주선했다.

이어서 쓴 첫 평론 <회화의 현대화 문제>(1958, 날짜미상, 연합신문)를 필두로 1957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한국 앵포르멜 운동에 있어서 열렬한 이론적 지지자의 역할을 해 나갔다. 이 시기가 방근택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생산성이 큰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굴과 전체적인 인상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는 복수의 증언은 당시 방근택의 비평이 갖는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 방근택은 서양의 각종 서적을 비롯하여 ‘미술수첩’과 ‘미즈에’ 등등 일본 서적을 입수, 최신의 정보를 얻어 이를 미술 현장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본격적으로 앵포르멜의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제4회 [현대]전의 전평으로 쓴 ‘화단의 새로운 세력-’현대‘전의 작가, 작품 단평’(1958)에 이어 방근택은 의욕적으로 김창열, 나병재, 박서보, 이양노, 장성순, 하인두 등등 현대전 멤버들의 화단활동을 지지해 나갔다. 당시 60년미협전을 비롯하여 제6회 현대전, 기타 여러 행사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방근택은 늘 중앙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존재의 위상학은 매우 암시적인 것으로 흔히 연령이나 서클 내의 위상에 따라 암묵적으로 위치가 정해짐을 말해준다. 박서보 또한 이 점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내가 본 어떤 사진에서 박서보는 기라성같은 스승 세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 있었다.

Ⅳ.

1950-60년대에 벌어진 화단과 평단 활동에서 주목받는 위치에 있던 방근택에게 있어서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저한 위상의 하락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8년 9월, 한국미술평론인협회의 간사를 필두로 이듬해 11월 현대미협 5회전의 선언문 작성, 1961년 4월 제2회 파리비엔날레 참가작가 선정 심사위원, 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출범에 참여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벌이던 방근택이 70년대에 접어들자 급격히 위축되게 된 것이다.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가 연루된 두 개의 큰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민족기록화전 필화사건1967년 8월)이며, 다른 하나는 반공법 위반 사건(1969)이다. 특히 후자는 본업인 평론활동을 법적으로 제지당함으로써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꼼꼼한 자료통인데다 강직한 성품에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비평가인 방근택은 바로 그런 성향 때문에 특정한 미술인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5, 60년대의 비정형 회화(Informel) 운동시기에도 피차 강한 개성들이 부딪치며 내는 강렬한 스파크가 조직에 균열을 이루면서 친교 관계에 수많은 알력과 갈등이 나타났다. 가령, 방근택은 훗날 쓴 회고록에서 자신이 작가들에게 비정형 회화 이론을 ‘어드바이스’ 내지는 ‘격려’ 운운 했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작가들의 진술과 상충되면서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하는 사실을 둘러싼 의문을 낳았다. 한국미술의 자생성과 해외미술 사조의 수용을 둘러싼 엇갈린 견해는 박서보, 윤명로, 서승원, 오광수 등 4인이 나눈 좌담 <체험적 한국 현대미술상(像)-한국 현대미술 태동기의 표면과 이면(특집/한국 현대미술 40년, 그 궤적과 전망), <한국미술> 창간호(1997년 4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사건은 60년대 후반에 발생했지만 정작 그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였다. 내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70년대의 방근택은 미술인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방근택은 전후 명동시대에 이어령을 비롯하여 송기동 등 문학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인맥은 훗날 문학사상을 비롯하여 현대문학, 시문학, 동서문학, 일요신문 등 문예지나 저널에 미술평론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바탕이 되었다. 보안법 위반으로 3년간이나 집필이 금지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미술계의 활동은 어려웠다. 결국 방근택이 찾은 길은 자연히 연구와 독서, 세계미술사연표 정리 등 미래의 웅비를 위한 나름의 준비였다.

<다음호에 계속>


6) 양은희, 앞의 책, 96-7쪽. 
7) 방근택, 체험으로 본 한국현대미술사1. <50년대를 살아남은 ‘격정의 대결’장, 공간, 1984년 6월호, 42-8쪽.
8) 회원은 이경성, 최순우, 이구열, 천승복, 석도륜, 임영방, 이일, 유준상, 오광수 등. 
9) 주간한국 7월 23일 자에 [민족기록화전]에 전시된 작품을 비판한 인터뷰가 실리자 거론된 작가 2명이 방근택을 사무실로 유인, 폭행한 사건을 이른다. 이 사건이 나자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방근택이 화가들에게 “계획적인 폭행을 당하고 입력에 의해 해명서까지 쓴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양은희 앞의 책, 408쪽. 
10) 동 8월-11월 경, 용산구 하숙집 거주 당시 하숙생들과 주인이 반공법으로 방근택을 사직당국에 고발한 사건이다. 방근택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104일 동안 구금된 후 2심에서 징역 3년 및 자격 정지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다(사건번호 69고 15151). 양은희, 앞의 책, 408쪽.  
11) 방근택, 앞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