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조선왕릉 수릉과 효명세자
[성기숙의 문화읽기]조선왕릉 수릉과 효명세자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7.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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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흔히 조선후기 순조조를 일컫어 정재 황금기라 일컫는다. 정재(呈才)재주를 바친다는 뜻으로 궁중무용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궁중정재는 약 50여종에 달한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23종의 정재가 조선후기 순조조에 창작되었다. ‘정재 황금기라는 수식을 충족해주는 긴요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유가의 예악정신을 품은 정재는 조선시대 왕궁문화의 꽃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정재는 일정한 법식에 따라 엄격하게 치러지는 의례가 포함된 궁중연향에서 추어졌다. 궁중연향이 가장 활발하게 봉행된 것은 조선후기 순조시대다. 특히 순조 27(1827)년부터 3년간 매년 대규모의 궁중연향이 설행되었다.

우선, 순조 27(1827) 자경전 진작은 순원왕후 존호 기념을 위한 잔치였다. 그 이듬해 순조 28(1828) 순조의 사순(四旬)을 축하하기 위해 진작연이 치러졌다. 마지막 순조 29(1829)에 거행된 진찬은 순조 등극 3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시기 매년 대규모의 궁중연향이 설행된 것은 조선시대를 통털어 매우 이례적인 기록에 속한다.

그렇다면 순조조 대규모의 궁중연향이 매년 연속해서 설행된 이유는 무얼까. 우선 당대 정치지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11세의 어린나이인 순조가 왕위에 오른다.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벽파가 정국의 실권을 쥔다. 병환중이던 정조는 숨지기 몇 개월 전 안동김씨 김조순에게 정사를 돌봐줄 것을 당부한다. 개혁적 군주 정조가 세도정치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어질지만 심약했던 순조는 정순왕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15세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그 즈음 외척 김조순으로 대변되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에 순조는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는 권력의 핵심인 비변사를 장악하고, 개혁적 성향의 인재를 등용하는 등 왕권강화를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간다.

효명세자의 업적 중 정치적 개혁과 더불어 문치를 통한 왕권강화를 모색한 점은 특별히 눈여겨볼 대목이라 여겨진다. 대리청정 중 그는 대규모의 궁중연향을 개최하여 왕실의 존엄과 영향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궁중연향을 통해 독창적 형식의 정재가 대거 창작되었음은 공연예술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예컨대, 독무형식으로 이루어진 춘앵전과 무산향이 주목된다. 6자 남짓의 화문석 안에서 춤춰야 하는 춘앵전은 단아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인다. 역시 독무로 추어지는 무산향은 대모반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춤춰야한다는 점에서 춘앵전과 유사한 공연문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정재 창작을 통한 이른바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한 점도 의미롭다. 예컨대, 고려시대 당악정재 형식의 헌선도를 바탕으로 향악정재 형식의 헌천화가 재창작되었다. 꽃을 주제로 한 헌천화는 임금께 꽃을 바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교식 예법으로 치러진 기신제, ·무형이 지평융합된 값진 문화유산 현장

고려시대 대표적 당악정재인 포구락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된 보상무 또한 이색적이다. 포구락은 채구문에 채구를 넣으면 상으로 꽃을 주고, 실패하면 벌로써 여령(女伶)의 얼굴에 먹점을 찍는 형식으로 유희성이 돋보인다. 보상무는 보상반을 차려놓고 연화의 항아리에 꽃을 넣는 형식인데, 포구락과 같은 맥락에 있다. 형식의 창조적 변용은 효명세자 예제(睿製, 왕세자의 창작)로 이루어진 정재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효명세자는 사후(死後) 문조로 추존되어 신정왕후와 더불어 동구릉(東九陵)의 수릉(綏陵)에 묻혔다. 22세에 아깝게 요절한 효명세자는 세 차례에 걸쳐 천장되었다. 처음엔 경종이 묻힌 의릉(懿陵) 왼편에 조성된 연경묘에 안장되었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명세자는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능의 이름도 수릉으로 바뀌었다. 이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양주 용마봉으로 천장되었다가 철종 6(1855) 동구릉에 조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수릉은 합장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봉분 안에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그의 아내 신정왕후가 합장으로 묘셔져 있다.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로 태어난 신정왕후는 순조 19(1819)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입궁했다.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효명세자와 달리 신정왕후는 83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에 오른다. 철종이 후사가 없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킨다. 그가 바로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다. 일명 조대비로 불린 신정왕후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과 손잡고 정국을 주도하며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검암산 동쪽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조성된 동구릉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릉은 동구릉에 속해 있다. 동구릉은 조선을 창건한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을 비롯 총 9(건원릉, 현릉, 목릉, 숭릉, 휘릉, 혜릉, 원릉, 경릉, 수릉)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450여년에 걸쳐 조성된 조선왕릉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와 전통이 담지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본래의 지형조건과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장묘문화와 풍부한 기록물, 그리고 엄격한 규칙에 따른 유교식 제례의식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조선왕릉은 이러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난달 25일 동구릉의 수릉에서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그의 아내 신정왕후의 기신제(忌晨祭)가 봉향되었다. 기신제란, 왕이나 왕후의 기일을 맞아 각 능에서 봉향하는 제사를 일컫는다. 향과 축을 든 초헌관이 대축에게 전하는 전향축례(傳香祝禮)에 이어 취위(就位), 진선(進膳) 절차가 진행되었다.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를 치르고, 마지막 축문을 불사르는 망료례(望燎禮) 의식으로 끝맺는다. 효명세자의 기신제는 전통예법에 따라 시종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검암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홍살문, 정자각, 비각 등 유교식 건축물과 봉분 그리고 능 지킴이인 각종 석물을 품은 유형유산과 유교식 제례의식으로 치러진 기신제라는 무형유산이 지평융합된 왕릉제향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에 투영된 특별한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