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장구대전, 원형에 가깝게 스승에 가깝게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장구대전, 원형에 가깝게 스승에 가깝게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07.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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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장구대전’은 훌륭한 기획이다. (7. 3. 국립국악원 우면당) 설장구의 중견 예인 6인의 기예를 비교해서 즐길 수 있었다. 농악은 공동체문화의 상징이지만, 그 안에서 개인을 존중한다. 장구대전은 농악의 개인놀이(설장구)를 무대화했다. 이런 형태의 공연은 21세기에 들어서 매우 드물었다.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시대에 ‘장구대전’과 같이 아날로그에 충실한 공연이 얼마만큼 관객에게 깊게 감동을 줄 수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그 시절의 장구명인, 전사섭에서 이정범까지 

이번 공연을 보면서, 과거 극장무대에서 돋보인 예인이 떠올랐다. 1963년 5월 29일,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 2회 명창명인대회 (시민회관)에서 전사섭이 장구를 들고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성악명창과 기악명인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전사섭(1911~1993)을 필두로 정오동(1906~1971), 김병섭(1921~1987), 김오채(1922~1994)가 우도농악을 중심으로 개인놀이의 매력을 세상에 알렸다. 전사섭(장구)과 전사종(꽹과리) 형제는 ‘농악의 무대화’에 앞장섰다. 둘은 정오동과 함께 3인으로 팀을 꾸려, 국내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정오동은 소고놀이(채상소고)는 유명했다. 판소리 5명창 김창환(1855-1937)의 손자인 김오채는 1950년대 주로 창극단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며 이름을 날렸다. 김병섭은 서울에 터전을 마련하고, 많은 무용가에게 농악과 설장구를 가르쳐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또 한 사람이 이정범이다. 1976년 10월 9일, 이정범 농악발표회(문화체육관)가 발표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렇게 개인의 이름을 내걸고 농악공연을 한 것은 이정범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리틀엔젤스 농악의 기초를 만든 이정범에게 대학 무용과 출신들이 가장 많이 배웠다. 

‘장구대전’의 주인공 6인은 저마다의 특장(特長)이 분명했다. 이동욱는 ‘김병섭류’였는데, 한 때 유명했으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위세가 덜한 김병섭류를 무대에서 잘 알리는 역할을 잘 했다. 염창수는 ‘최상근류’였다. 금산농악단으로 유명한 최상근은 좌도농악에 뿌리를 둔다. 최상근(1908년생)은 대회굿(민속예술경연대회)로 인기를 끌었다. “40여년을 농악대를 따라다녔다는 최상근은 장고를 메고 5분이 넘도록 맴을 돌며 장고놀이를 멋지게” 선보였다는 기사가 있다. (1961. 9. 29. 경향신문) 염창순은 씩씩한 좌도농악의 멋스러움을 잘 표현해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욕심을 더 낸다면, 과거 최상근이 그랬던 것처럼 ‘연풍대’가 좀 더 길고 분명하게 오래도록 관객에게 감흥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임재태를 최고로 꼽는 이유 : 호흡이 살아있는 설장구 

임재태는 ‘김동언류’였다. “그래, 이게 바로 우도굿이야.” 그의 설장구를 들으면서 절로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크게만 치고 빠르게 치면서, 숨 쉴 곳을 잃어버리면서 국악타악의 안타까움이 일순 해소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완급조절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잃어버린 호흡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설장구로 대화를 하면서 여유를 부릴 줄 알았다. 여유를 부린다는 건, 끼를 부린다는 것과 다르다. 개인적인 취향과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서 6인이 모두 최고이겠지만, 나는 이번 장구대전의 최고로 임재태를 꼽으려 한다. 

감한준은 ‘박염류’를 소개했다. 영남농악은 북이 많고, 장구의 가락이 단순하다고 한다. 이런 단순한 가락이 영남농악의 매력이다. 이번 무대에선 북을 비롯한 다른 악기의 비중이 너무 높았다. 앞으론 다른 악기의 도움없이 명실상부하게 ‘설장구’ 독주로서의 체제를 더욱 갖춰야 한다. 이미 그는 충분히 자질을 갖추고 있다. 김한준의 장구는 묵직하고 편안하면서도 강했다. 경상도 토박이말처럼 들렸다. 우도농악이나 좌도농악과는 다른 영남농악만의 특장(特長)이다. 
구경꾼과 교감하는 능력에선 박현승이 가장 앞섰다. ‘김형순류’를 들고나왔는데, 가락과 몸짓의 조화도 괜찮았다. 궁편과 열편(채편)의 각기 다름을 드러내면서도, 음향적인 균형감을 염두에 둔 타법도 특징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객석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실제 ‘김형순류’ 또는 ‘설장구’ 자체에 집중을 해서 그 예술성을 느낄 분위기를 만들어 주길 못했다. 연희자가 너무도 구경꾼을 의식해서 그렇다. 만약 인기상이 주어진다면 이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현조는 ‘김기복류’였다. 안성남사당놀이 웃다리농악에 근거를 둔 설장구라고 한다. 남사당 자체가 로컬리티보다는 엔터테인먼트를 더 우선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하현조의 기예는 나무랄 데가 없다. 장구를 치는 자태에서 중간에 삽입되는 무용적 동작이 마치 ‘신무용’을 보는 듯 세련미가 느껴졌다. 설장구와 장구춤의 중간 형태라고나 할까? 결국 설장구라는 것이 장구의 타법(打法)을 중시하면서 펼쳐지는 장르라고 한다면, 앞으로 이 부분에 더 치중할 필요가 있다. 

농악의 순수성, 진정성, 원형성 

‘농악대전’이 앞으로 농악의 순수성, 진정성, 원형성을 회복하는데 또 하나의 좋은 출발점이길 희망한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농악은 100년전의 농악과 비교해서 어떨까? 지금은 장구의 가죽도 달라졌고, 장구를 메는 방식도 좀 달라졌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과거의 농악’ 또는 ‘농악의 원형’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장구대전에 오르는 예인은 달라야 한다. 이 무대에서 만큼은 ‘000류’를 표방한 만큼, 더욱더 000라는 명인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영화 ‘수업료’ (1940년)에는 수원화성(華城) 창룡문앞에서 펼쳐진 농악에 대한 장면이 잠깐 펼쳐진다. 1분 정도의 이 장면을 통해서, 과거의 농악과 지금의 농악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당시 경기지역에서 불었던 태평소가락을 알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대한뉴스를 보면, 민속예술경연대회를 비롯해서 여러 현장에서 펼쳐진 농악의 모습을 비록 짧으나마 알게 된다. 이런 자료를 허투루 지나치길 말았으면 한다. 농악대전에서 만큼은 장구의 가죽피의 선택에서부터 장구띠를 메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이 무대 만큼은 가능한 원형에 가깝게, 스승에 가깝게 해주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