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한국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그녀에게’
[성기숙의 문화읽기]한국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그녀에게’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7.2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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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육완순 1주기 추모공연을 통해 회고한 육완순의 존재론적 의의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작년 이맘때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陸完順, 1933~2021) 선생이 타계했다. 갑작스런 비보에 문화예술계가 충격에 빠졌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졌다. 부고 소식과 함께 조문객을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당시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상황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황망했다. 선생의 마지막 길을 꼭 배웅하고 싶었다. 빈소가 마련된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작고하기 며칠 전까지도 육 선생과 통화했기에 갑작스런 별세 소식이 실감나지 않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불연 듯 찾아오는 ‘불청객’임을 새삼 깨달았다. 

무용가 육완순 선생이 소천한지 일년이 지났다. 지난 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이사장 양정수) 주최로 故 육완순 추모공연이 열렸다. 육완순의 첫 제자 하정애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과 영화계의 거장 김동호 선생이 공동위원장을 맡아 추모행사를 총괄했다. 온종일 잿빛 하늘이던 날씨는 공연이 시작된 저녁 무렵 한 두 방울 비를 뿌렸다.

“육완순, 그녀에게”를 타이틀로 제자와 후배들이 꾸민 1주기 추모공연은 시종 경건하고 융숭깊게 치러졌다. 육완순 안무작이 연대기별로 제자 혹은 후배 무용가들에 의해 재조합 내지 재해석된 무대였다. 이화여대 무용과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제자들과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에서 활동한 후배 무용가들이 참여함으로써 그 의미가 한층 배가됐다. 70여분 진행된 추모공연은 고인에게 바치는 몸의 편지 혹은 몸의 기록으로 진한 감동을 안겨줬다. 

육완순, 미국 현대무용 이식의 주역 

주지하듯, 20세기 초반 발레의 법식에 반하여 새롭게 등장한 모던댄스(Modern Dance)는 양대 산맥으로 전개되었다. 이사도라 던컨, 마사 그레이엄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현대무용과 마리 뷔그만이 주도한 유럽식 현대무용이 바로 그것이다. 후자는 일명 독일식 현대무용이라 불리기도 한다. 

근대 초기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를 통해 이 땅에 처음 모던댄스가 유입되었다. 이시이 바쿠는 1920년대 초반 유럽에 유학, 서양 모던댄스를 배우고 귀국 후 신흥무용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문하에서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 최승희·조택원은 신무용(新舞踊)을 창출하여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춤의 선구자다. 해방직후 최승희가 월북하고, 조택원이 미국으로 건너간 후 독일식 현대무용은 일본 유학파 출신 박외선이 맥을 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식 현대무용은 언제, 누구에 의해 한국에 도입되었을까? 알다시피, 육완순은 미국 현대무용의 한국적 수용의 주역으로 통한다. 그는 1960년대 초반 미국 뉴욕에 유학, 마사 그레이엄을 사사했다. 마사 그레이엄은 상징성, 신화, 정신탐구 등 내면을 주제로 주옥같은 명작을 남긴 거장으로 미국 현대무용을 표상하는 인물로 알려진다. 

주목할 것은, 육완순이 이식한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contraction and release)  테크닉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수축하고, 숨을 내쉬면서 이완하는 신체 움직임을 특질로 한 수축과 이완 기법은 움직임의 근본원리로서 원초성을 지닌다.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화두로 한 현대무용의 무한한 움직임의 발굴에 효용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당시 무용학도들이 깊이 탐닉했고, 아울러 급속히 확산되기에 이른다. 

거기엔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육완순이 한국 최고의 명문 사학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하여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여정과 무관치 않다. 1963년 춤의 선구자 박외선의 헌신으로 이화여대에 한국 최초로 무용과가 창설되었다. 엘리트 무용교육을 통해 춤아카데미즘 운동이 본격 전개되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완순 선생은 시대 운도 타고난 셈이다. 해방이후 무용분야 미국 유학파 제1호인 그는 20대의 나이에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하는 행운을 누린다. 육완순이 배출한 초기 제자 대부분은 훗날 각 대학의 무용과 교수가 되어 미국식 현대무용을 널리 확산시키는 주체가 된다. 1970~80년대 춤아카데미즘의 토대위에서 미국식 현대무용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 동작체계는 교육현장에서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통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창작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현대무용 정신에 비춰볼 때 춤매소드의 획일화 경향은 퇴행적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회고하건대, 퇴행을 방어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해방이후 무용분야 프랑스 유학파 제1호 남정호(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의 존재에서 찾아진다. 육완순이 이식한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은 1980년대 프랑스 유학파 남정호 등장 이전, 한국 현대무용계에서 주류 테크닉으로 통용되었다. 박외선의 직계제자로 이화여대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남정호는 부산 경성대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로 부임, 유럽식 현대무용을 파급시켰다. 

궁극적인 변화의 동력은 역시 교육에서 찾아진다. 1990년대 초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개원과 함께 다양한 동작어법이 교육현장에 도입됨으로써 한국의 현대무용은 보다 폭넓은 층위를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양 현대무용의 한국적 수용과정에서 육완순의 역할은 기억할 점이라 여겨진다. 1960년대 육완순에 의해 미국 현대무용이 이 땅에 본격 이식되었다는 점은 무용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몸의 편지, ‘육완순 그녀에게’   

추모공연 “육완순 그녀에게” 첫 무대는 1963년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 육완순의 ‘Basic Movement’가 소환됐다. 초연당시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 테크닉은 혁신적 기법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Basic Movement’는 엄밀히 말해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라기 보다는 기본춤적 성격이 짙다. 원본을 토대로 신창호가 재구성한 무대는 기본에 충실한 교과서적 움직임이 돋보였다.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1963년 작, ‘흑인영가’는 미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직계 제자 안신희가 재구성한 ‘흑인영가’엔 중년 혹은 노년에 접어든 육완순의 ‘어른 제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젊은 날의 힘찬 기운은 덜하지만 연륜 배인 숙성된 몸짓은 집중도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작품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는 육완순과 거의 동의어로 인식된다. 1973년 영국 태생 앤드루 웨버의 록오페라를 육완순이 현대무용으로 안무한 작품이다. 초연이래 지금껏 국내외에서 약 300여회 공연되는 등 경이적인 기록을 자랑한다. 현대무용의 저변확대와 대중화를 견인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번 추모공연에서 예수역의 최두혁, 막달라 마리아역의 이윤경이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린 주역답게 밀착된 교감으로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육완순 선생의 유작도 무대에 올랐다. 2013년 “육완순 현대무용 50년 페스티벌”에 초연된 ‘아직도 최고의 날을 꿈꾼다’가 바로 그것이다. 제자인 중견안무가 이윤경·장은정이 스승의 예술혼을 되새김했다. 영상 속 춤추는 육 선생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붉은 핏자국이 짙게 배인 흰 원피스 차림의 격렬한 몸짓은 섬뜩한 전율을 안겨준다. 최고의 날을 꿈꾸며 더 높은 곳을 향하는 끝없는 갈망이 처연한 미감으로 다가온다.    

실로 경이롭다. 70대 후반의 나이에 이토록 치열하고 격렬하게 춤을 출 수 있었다는 것이 말이다. 일생을 무용에 저당잡혀 살아온 육완순의 삶의 편린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는 듯 싶다. 몸의 하강에도 쉼 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비장하고 결사적인 춤으로 내면 정서를 투영한 『그리스인 조로바』에 등장하는 갈탄의 모습이 연상된다. 온 몸이 부서질 듯 맹렬히 춤을 춤으로써 비로소 조로바의 독백처럼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無)가 되는’, 초월적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존재의 근원을 탐문한 영상 속 육완순의 몸짓은 몹시도 치열하다. 재현한 작품 속 제자들 역시 순백의 원피스 차림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은 한결 정제된 느낌을 안겨준다. 바람, 물, 바위를 뚫고 빛을 향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상 속 육완순의 몸짓에 무대 위 제자들의 움직임이 오버랩되면서 스승의 존재는 차츰 소멸된다. 평온이 깃든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천상의 스승에게 한발 더 다가선 무대였다.

마지막 작품 ‘영혼의 불꽃’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빛의 열매로 꾸민 퍼포먼스로 육완순의 예술정신을 반추한 무대였다. 양정수 안무로 육완순의 제자들이 대거 무대에 올랐다. 맏제자 하정애를 비롯 이정희, 박명숙, 최청자, 남정호, 양정수, 황문숙, 한선숙, 김양근, 안신희, 전미숙, 이윤경 등 육완순 문하에서 안무가로 일가를 이룬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퍼포먼스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결하다. 두 손에 움켜진 불빛이 어둠을 밝힌다. 서로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하거나 포옹하는 등 스승을 매개로 스스로의 춤인생을 보듬은 장면은 다분히 제의적이다.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제자도 더러 눈에 띈다. 특히 커튼콜 장면은 잊지 못할 감동을 자아낸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영상에는 공연을 마친 육완순이 관객의 열띤 환호 속에 인사하는 장면이 흐른다. 올림머리에 푸른색 롱드레스 차림의 육완순은 두 팔을 높이 펴들어 환희에 찬 미소로 관객과의 교감을 꽤한다. 대형 사이즈의 영상에 스승 육완순의 모습이 스며들자 무대 위 제자들은 양 옆으로 이동하여 길을 터주는 동시에 박수로서 스승을 맞는다. 한없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그리움을 투영한 한 편의 헌시(獻詩)로 읽힌다.

무용예찬론자 육완순의 업적

고(故) 육완순 추모공연은 춤과 영상의 조화가 돋보였다. 특히 영상 속 육완순의 육성은 그의 존재론적 의미를 새삼 일깨운다. 그는 말한다. “무용이 삶이었고, 삶이 곧 무용이었다”고. 그는 무용가의 삶이었기에 실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육완순은 지독스럽게도 무용을 아끼고 사랑한 소위 무용예찬론자였다. 

무용예찬론자 육완순의 무용인생은 실로 화려하고 눈부셨다. 1960년대 초반 미국 유학은 그에게 꽃길을 열어줬다. 그 시절 미국은 전후(前後) 냉전이데올로기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초강대국으로 우리에게는 가장 강력한 우방국으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과 6.25 전쟁 등 격동기를 관통한 척박한 토양에서 미국 유학이라는 그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한마디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다. 자유로운 창작이념을 표방한 현대무용은 그의 기질과도 잘 맞았다. 미국 유학을 통해 세계 현대무용의 거장 마사 그레이엄을 사사하고 ‘수축과 이완’ 테크닉을 이 땅에 도입했다. 춤의 선구자로 한국 현대무용의 초석을 다졌다.

우수한 인재양성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에 속한다. 1963년부터 1991년까지 약 30여년 간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무용인재를 길러냈다. 그가 뿌린 현대무용 씨앗은 어느덧 무성한 숲은 이룬 형국을 보여준다. 아울러 국제행사를 주관하는 행정가 또는 프로모터 역할로서 한국 현대무용의 세계무대 진출을 주도하는 등 국제교류 영역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 

한국현대무용사의 변곡점엔 늘 그가 버티고 서 있다. 1963년 미국식 현대무용을 처음 선보인 이래 1975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창단을 통해 현대무용의 예술적 진화를 견인했다. 창단멤버인 이정희, 김복회, 김화숙, 박명숙, 박인숙 등은 한국 현대무용 발전의 최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창단이 당대 한국춤의 흐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신무용 일변도의 창작경향을 탈피하여 새로운 창작춤운동을 촉발시키는 등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었다. 1976년 이화여대 한국무용 전공 동문들이 결성한 동인단체인 한국창작무용연구회(창무회, 초대회장 임학선)는 그 결과의 소산으로 가치 있다.   

육완순의 활동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열악한 창작환경을 극복하고 현대무용의 저변확대를 위해 1980년 한국현대무용협회를 창립하여 구심체 역할에 나섰다. 동시대 지구촌 모던댄스의 최고 수작을 소개하는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창설(1982)도 선생이 남긴 큰 업적이라 하겠다. 1990년대 아메리칸댄스페스티벌(ADF)의 서울개최를 통해 인적 교류의 기회 제공과 더불어 선진 문화강국의 무용수준을 가늠케 했다. 아울러 1992년 시작된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은 그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은 행사로 브랜드적 가치가 높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1985년 발족된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는 국내외 활동의 주요 터전이 되었다.

육완순이 남긴 기억해야 할 어록이 또 있다. 그는 ‘무용으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무용으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신념은 생애 끝자락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선생은 10여년 전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되기까지 산파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십 년간 후배 무용가들과 더불어 국립현대무용단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얻어낸 성취라서 더욱 값지다.

알다시피, 국립현대무용단은 2010년 이명박 정부시절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재임 때 창단되었다. 이 땅에 현대무용이 도입된 이래 약 80여년 만에 달성된 쾌거로 무용계 전체가 환호했던 기억이 새롭다.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공적(公的) 제도의 창출로 한국 현대무용은 한 단계 도약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육완순은 한국 현대무용의 새 지평이 열리는 역사적 순간 순간마다 늘 그 중심에 있었다.  

무용계 ‘참 어른’, 원로의 품격  

기억하건대, 『춤』지 발행인 조동화 선생은 육완순을 일컫어 ‘한국현대무용의 대모’라고 칭했다. ‘대모(代母)’의 사전적 의미는 ‘한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여자’를 뜻한다. 이화여대 교수시절 최고 전성기 육완순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절제되지 못한 영향력으로 인해 일부 과오도 있었고, 또 그로 인한 부침도 겪었다. 

육완순은 인생의 위기를 ‘무용의 장’ 안에서 왕성한 예술활동으로 극복하는 남다른 저력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대신 무용계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공적 의식으로 헌신했다. 무용인재 발굴 및 국제무대 진출의 발판 제공, 국립현대무용단 창단에 기여한 공로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선생은 한마디로 무용계의 ‘큰 우산’과 같은 존재였다. 장르를 망라하여 후배, 제자들의 무용공연을 몸소 찾아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술세미나 혹은 전시회 등 무용과 연관된 행사장에서 선생과 조우하는 것은 흔한 일상에 속했다. 육완순 선생은 보기 드문 무용계 ‘참 어른’으로서 원로의 품격을 대변해 왔다. 이는 장르를 불문하고 무용계 후학들이 선생을 존경하는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21년 겨울, 「무용가 육완순의 편지」(서울문화투데이, 2021.1.27.)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육 선생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글을 토대로 엮은 서신집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2020)에 대한 서평 내지 소회 글이었다. 예상치 못한 글 기고에 육 선생은 옛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서 만남을 요청해왔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됨으로 인해 약속은 몇 번 연기됐다. 끝내 만나 뵙지 못한 채 선생은 저승길을 재촉했다.

“성 교수!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우리 무용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 같아요? 우리 무용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해요?” 선생이 던진 질문들이 귓전을 멤돈다. 시대와 함께 호흡한 대가다운 질문이다. 육완순 선생은 명실상부 한국무용계의 거목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