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다.” 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나의 춤은 음악의 혼, 그 자체다.” Ⅱ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8.1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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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호에 이어>

이러한 그의 의지는 고대 그리스 무용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는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스 도자기와 조각을 보며 무용의 원형을 상상했다. 큐피트 청동상의 춤추는 모습은 토실토실한 발과 팔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발바닥을 땅에 붙이고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들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럽기에 아름다웠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그가 찾아낸 춤은 ‘기도’였다. 춤은 저 깊은 심연에서 원래 존재하던 저 높은 곳으로 다시 날아오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스러움을 되살린 이사도라의 노력은 몸의 해방이자 춤의 르네상스였다. “나의 춤은 내가 창조해 낸 게 아닙니다.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일깨웠을 뿐입니다.” 

그는 춤과 음악의 합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 속옷을 입지 않은 채 그리스풍의 튜닉 하나를 두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이 자유로운 예술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신발이나 옷은 나를 방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돼서 해변에서 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들이 나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고 느끼곤 했다.” 지나친 노출을 비판하면 그는 대답했다. “제 몸은 제 예술의 성전입니다.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의 뜻으로 몸을 노출한 것입니다.” 그리스의 정신에 심취한 그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아프로디테의 음식인 굴과 포도주의 영향으로 나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춤을 추었습니다.” 

이사도라의 남성 편력은 그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메뉴다. 그는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를 사랑해서 딸 데어드르를 낳았다. 자신을 여신으로 숭배한 백만장자 패리스 싱어를 받아들여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하지만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라피타’(즉흥적으로 사귄 연인)들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의 말을 인정한다면 이 많은 사랑을 윤리의 잣대로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는 뜨겁게 삶을 사랑했다. 그가 사랑한 건 남자가 아니라 생명의 아름다움, 빛나는 예술적 열정이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해, 36살 이사도라에게 가장 아픈 일이 일어났다. 7살 난 딸 데어드르와 3살 난 아들 패트릭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미 신경쇠약을 앓고 있던 이사도라의 내면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스러지는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며 다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아기를 잃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돕기 위해 더 용감해질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여인, 전쟁에 희생되는 노인들, 헐벗고 굶주린 고아들을 위해 춤을 출 것입니다.”

세상은 냉정했다. 한때 그에게 열광했던 프랑스, 독일, 미국에서 그는 더 이상 무용을 계속하고 후학을 가르칠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서구 사회의 속물성에 넌더리가 난 그는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다.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날, 그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거리로 나가 춤을 추었다. 파리에 와 있던 소련 관리가 “모스크바로 오면 훌륭한 무용 학교를 세워주겠다”며 접근했다. 하지만 1921년 여름, 그가 도착한 모스크바는 황량했다. 1,000명의 소녀들을 모집해 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부가 그녀에게 보여준 최신 춤들은 조악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이 추고 있는 춤은 노예의 춤이에요. 모든 동작이 땅을 향해 움직이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유인의 춤을 배워야 해요. 머리를 높이 들고 팔을 넓게 뻗어요. 마치 우주 전체를 껴안듯….”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켄 러셀 감독, <이사도라, 세계 최대의 무용가> 중에서) 
 

거침없는 이사도라의 태도는 소련 당국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소련 정부는 이사도라의 춤에 검열을 가하려 들었다. 집시가 등장하는 춤은 반혁명 요소가 있으니 조심하라 했고, 리허설 때 차르 찬가가 들리는 이유가 뭔지 추궁했다. 표현에도 한계가 있다는 검열관의 말에 이사도라는 대답했다. “제 예술에는 한계가 없어요.” 소련도 그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사도라는 혁명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18살 연하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사랑에 빠졌다. 죽은 아들 패트릭이 어른이 됐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예세닌에게 서구사회를 보여주려고 해외여행을 신청했는데, 두 사람이 부부일 경우만 허가해 줄 수 있다는 당국의 대답에 주저없이 결혼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젊은 남편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사도라를 구타하고 폭언을 일삼았다. 이사도라의 영혼은 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이사도라가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하며 핍박했다. 동서로 갈라진 이 세상은 그의 예술을 포용하기엔 너무 편협했다.  

그의 별명은 ‘맨발의 이사도라’다. 어느 공연 직전,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샌들에 술병을 엎지른 그는 어쩔 수 없이 맨발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뜻밖에 모든 이들이 이 발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고, 이렇게 해서 ‘맨발의 이사도라’가 탄생한 것이다. 그의 춤처럼 그녀의 삶도 맨발이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언제나 더 많이 돈을 썼다. 뜨겁게 삶을 즐겼고, 제자들을 키웠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 그의 춤은 ‘음악의 혼’ 자체였고, 잠시나마 지상의 모든 추한 것들을 압도해 버렸다. 그는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작은 아이들이 쓰레기더미 위에 쪼그리고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을 보았어요. 만일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면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귀여운 아이들이 고통 받도록 방치하는 한 이 세상에는 어떤 진정한 사랑도 존재하지 않아요.”  

1927년 9월 14일 저녁 9시경, 그는 새로 만난 ‘세라피타’인 정비공 팔체티가 몰던 2인용 스포츠카를 탔다. 그는 신난다는 듯 외쳤다. “안녕, 내 친구들, 나는 승천하노라!” 차가 출발하자마자 그가 두르고 있던 빨간 숄이 뒷바퀴 축에 끼었고, 그는 목이 졸렸고, 허공을 가로지른 그의 몸은 순식간에 차체와 바퀴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고뇌의 눈물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완전한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사랑과 춤에는 고뇌의 눈물이 맺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했어. 춤을 추면서 그들에게 나의 영혼을 주었어. 이 아름다움은 결코 죽지 않을 거야. 세상 어딘가에 영원히 남아 있다고 전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