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이건용 작가 “자기 생각대로 살았고 자기 생각대로 표현한 작가“
[Special Interview]이건용 작가 “자기 생각대로 살았고 자기 생각대로 표현한 작가“
  • 이우상 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22.08.10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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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장소로 표현하는 미술 –이건용의 작품세계
이우환 이어 두 번 째로 세계적 명성 페이스 갤러리 전속작가 선정
이건용의 신체이론은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몸 이론」을 뛰어넘는 것
8월 25일부터 열리는 서울 리안갤러리 개인전이어 파리와 미국 라크마 전시 줄줄이 예정돼

[서울문화투데이 이우상 기자/미술평론가] 이건용의 미술을 바디스케이프 또는 신체드로잉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말이지만, 이건용이 1967년 홍대 미술학부를 졸업한 이후 끊임없이 추구해 온 예술철학 「몸과 장소」 이론이 그대로 녹아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자신의 작업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그의 그림이 요즈음 미술시장에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가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의 작품이 완판됐고, 올해 1월 홍콩 페이스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이는 페이스 갤러리와 전속계약 후 열린 첫 전시회였다.

페이스 갤러리는 세계 미술시장에 영향력이 큰 갤러리로 뉴욕, 런던 등 전 세계 9개 대도시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작가로는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로 전속계약을 맺고 있다. 얼마 전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이건용의 작품 이야기를 하다 어느 화상 한 분이 “이건용 그림은 이해할 수가 없어, 평론가들은 뭐하고 있어!” 하며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함께 비판해주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글쎄요, 드로잉과 색깔이 좋지 않아요?” 하고 오히려 호평했던 일이 있었다.

이 일 후에 기자는 이건용에 관한 평론과 기사를 검색하던 중 그의 신체이론을 접하고서 그의 예술철학에 경도하게 된다. 이건용의 신체이론은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몸 이론」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퐁티가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축은 몸이며 모든 의식과 지각은 이러한 몸의 활동 즉 움직임을 통해서 가능하다. 또한 다양한 예술장르에서의 표현은 움직임을 동반하며 움직임은 표현의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제공한다고 퐁티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건용은 여기에 장소를 더해 “우리의 몸은 장소를 빌림으로써 몸이 몸일 수 있고 존재한다”고 그의 신체이론을 펴나간다. 그가 홍대 졸업 후 이대 입구 대현동에 화실을 차리고, 시간과 장소를 뜻하는 ST그룹을 만들어 회원들과 치열하게 토론해 왔던 이론들이 그의 예술철학으로 녹아서 그의 작품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1960년대 말 이후 지금까지 이건용이 펼쳐왔던 기념비적인 퍼포먼스와 작품들에 「장소의 논리와 신체드로잉」이 펼쳐진다. 이건용과 홍대에서 같이 수학하고 졸업 후 ST 그룹을 함께 창설하고 토론했던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어느 모로 보나 이건용은 이단아의 자질은 아니었다. 조용한 편 인데다 과한 면은 추호도 없는 그가 행위예술을 할만한 적극적인 이유는 없었다” 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건용을 행위하는 작가로 만들었을까? 김복영 교수는 “내가 아는 한 인습에 대해서만은 권태스러워 했던 기억이 있고, 대신 그는 언제나 자신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았다” 고 말하고 있다. 즉 이건용은 새로운 회화기법이나 예술사조에 연연하지 않고 그만의 미술을 실험하며 찾아 나섰던 작가라는 의미이다.

이번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후대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하고 물었을 때, 작가는 주저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았고 자기 생각대로 표현한 작가” 라고 말하며 “자기 생각대로 의심 없이 밀고 나가기가 참 중요한 일인데 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하고 비교를 안 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집약되는 이건용의 미학 즉 그의 예술관을 인터뷰를 통해 아래에 기술한다.

▲작가가 즉석에서 화판 뒤에 서서 화판을 안보고 그리는 작품을 시연하고 있다
▲작가가 즉석에서 화판 뒤에 서서 화판을 안보고 그리는 작품을 시연하고 있다 ⓒ김재성 사진기자

자기 생각대로 표현했고 다른 이와 비교를 안 했던 이건용 작가

인터뷰는 이건용 작가의 새 작업실인 고양시 삼송 테크노밸리에서 이루어졌다. 약속보다 좀 일찍 사진기자와 함께 작업실에 도착하니, 작가가 직접 문을 열어주며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입구에 걸려있는 그림부터 시작하여 작품설명이 이루어졌다. 모든 작품이 신체드로잉이었다. 캔버스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도 그리는가 하면, 캔버스를 등지고 그리기도 한다. 눈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장소의 움직임에 따라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바닥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라는 퍼포먼스를 직접 시연한다. 원 밖에서는 원 안의 사물이 <저기>가 되고 원 안에 들어오면 <여기>가 된다. 또 원을 나가서는 원 안의 사물이 <거기>가 되며 행동이 끝난 후에는 금을 밟으며 <어디>가 된다. 작가가 1975년에 시연했던 퍼포먼스였고 미친놈 소리도 들었다고 하지만, 신체와 장소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의 도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하트모양의 그림 앞에 와서는 이 그림은 화판을 옆에 두고, 양손으로 반원을 번갈아 가며 그린 것인데, 하트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를 설명한다.

군산에 살 때 어느 여자분이 그림을 사러 왔는데, ”선생님 하트 작품 사러 왔습니다“ 하여 작가는 하트 작품을 그린 적이 없다고 하니, 도록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이 그림을 지적하여 하트가 됐다고 한다. 작가는 「예술은 소통입니다」 하며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이 하트 작품은 같은 형태로 제작하되 그림을 사는 사람이 색을 선택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건용의 예술철학 중 신체와 장소 외에 소통이 그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꽤 넓은 작업실 입구에서 선 채로 그의 작품을 소개하다가 이윽고 작업실 중앙의 테이블로 옮겨 음료수를 들며 그의 예술론이 계속된다. 작업실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 작업실이 있고 2층에는 영상실과 부속실이 있다.

‘예술은 소통’이라는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뭐 우리한테 부족한 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있는 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 그것이 예술이다, 자신이 쟁이가 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뭔가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내 신체조건과 평면이 물감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드러내는 것, 그게 회화다

거기에 소통이 들어가나?

그렇다, 그러나 그게 어려운 것이다.

작가가 중학생 때 서울대 다니는 선배들과 예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이야기 하는지 통 이해가 안 됐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예술에 있어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다. 예술을 뭐 하나 해놓고 이것을 관념적인 철학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작품이 몇 년 전부터 대기 중인 구매고객이 수십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글쎄 그동안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화랑이 팔아먹을 게 없는 사람! 201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개월간 개인전 열어주고, 해외에 있는 관장, 큐레이터, 평론가들이 보고 가서 ‘야, 이 사람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어?’ 하며 놀랐다. 그러면서 이건용의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화랑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몰랐지 내가 숨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파리, 북경, 동경, 호주, 미국 등 어디고 돌아다녔다’ 라고 했다.

올해 하트 아이디어를 갖고 강남의 송원 신사옥 갤러리에서 소품 100점을 드로잉 했다. 원래는 「이건용의 하트 100점 뮤지엄」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팔지 않고 보관 전시만 하기로 계획했다. 앤디 워홀이 살아 있다면 울고 가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같은 하트를 복제한 것이 아니라 다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이건용이 다룬 장르는 크게 오브제,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 네가지로 대별된다고 정의한다. 그의 오브제 중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은 1973년 ‘파리 국제비엔날레’ 파리시립미술관에 출품된 「신체항」이다. 이 작품은 나무 둥치의 상부를 자르고 하단부와 뿌리를 잔존시킨 채, 기단부를 현장의 흙으로 채우고 뿌리를 심어놓은 작품이다.

1970년대 파리 국제비엔날레 참가할 때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당시 정부 보조를 받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화실 근처 지역상인들과 유지들이 아침에 모여 모닝커피를 마시는 대현동 어느 다방에 들어가 난생처음 모닝커피를 시킨 후 일어나서, 국위선양을 위해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참가하는데 항공료가 부족하다고 협조를 구했던 일이 있었다. 반응이 없어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창가에 앉았던 50대 남자 한 분이 불러서 무슨 이야기냐고 다시 물었다. 제2 한강교 지나기 전 오른쪽에 홀트양자회가 있는데 거기 가서 유럽 가는 고아를 데려다주겠다 하면 비행기 표를 준다고 가르쳐줬다. 9월에 파리 비엔날레가 있는데 마침 8월에 유럽에 갈 고아 2명이 있다고 하여, 갓난아이와 두 살배기 어린이를 오슬로와 스톡홀름 거쳐서 해당 기관에 인계해주고 파리에 갈 수 있었다.

용기가 참 대단하시다. 다방에서 공개적으로 협조를 구하고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미친놈이죠. 나는 안되다는 게 내 인생에 없었다. (웃음)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젊었을 때부터 내가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파리에 도착했더니 「신체항」이라는 작품을 만드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나무를 누가 줘요? 고생 참 많았다. 그때가 드골정권 시절인데 프랑스 정부가 국립공원 수 하나를 기증해 줬다. 그래서 만든 것이다.

신체항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계는 몸으로 이루어졌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었고 내가 크리스챤인데, 만약 신이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메시지만 보냈다면 나는 그 신을 안 믿을 것이다.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여인을 통해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하여 받아주고 이것이 참사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떠나가셨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냥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몸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와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캔버스를 등지고 뒤로 드로잉한 작품
▲작가가 캔버스를 등지고 뒤로 드로잉한 작품 ⓒ김재성 사진기자

작가의 예술론에 소통이 중요한 것처럼 종교관에도 소통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 자체는 몸으로 존재하고 호흡하고 보고 느끼고, 상호 간 만나고 관계되고 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며 회화도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회화에서 물감을 바른다는 것은 신체가 움직이는 것이고 그다음에 기름이나 물감을 써서 바르면 칠해지는 것과 동시에 흘러내리고 하는데, 그러한 현상 자체를 나는 회화로 본다. 요즈음은 붓 말고도 뿌리고 던지고 몸을 직접 쓰기도 하며 회화의 개념이 다 틀리다.

(이어서 작업실 한편의 100호짜리 그림을 가리키며)이 작품은 앞에서 그린 게 아니다. 큰 붓을 긴 막대기에 연결해서 화판 뒤에서 맨 처음은 어두운색으로 막 때린다. 화면 뒤에서 내가 어디를 어떻게 칠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다음에 밝은색을 또 때린다. 그럼 섞인다. 섞이는 농도가 다르고 또 흘러내리고 한다. 앞에서 그리는 친구들이 와서 '와, 좋다 기운생동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리는지 그 사람들은 모른다”하며 신체와 회화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 그림은 금년 봄에 프랑스 '루이뷔통 미술관'이 100호짜리 3점을 소장했고, 작년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LA 시립 '라크마 미술관'에서도 100호 그림을 소장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영성에 대비해 몸을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몸을 악이라고 한다.

몸을 죄의 산물로 여기는 생각들이 과거에는 많았다. 기자도 기독교인으로서 이전에는 행위예술이나 다다이즘을 종교와 같이 갈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몸으로 이루어졌다」 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작가의 몸 이론을 접하고 나서 오히려 예수도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다다이스트가 아닌가 생각하는 출발점에 서게 됐다. 인간으로서 창으로 찔리고 고통을 겪으며 그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하기까지 몸으로 그 순종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버님이 지도자급 목사님이었다고 하셨는데, 몸 이론과 행위예술과 관련하여 혹시 의견 충돌은 없었나?

아버님은 문학을 하셔서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다. 고향이 황해도 사리원인데, 친조부님이 양의사였다. 그 당시 종친들이 많이 살았던 강원도에 역병이 돌아 그 친척들을 치료하러 강원도에 가셨다가 그만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조부의 소지품을 정리하러 그곳에 갔는데 조부의 짐 속에서 쪽 편 성경책을 찾게 됐고, 그 성경책으로 인해 서울신학대학에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는데, 외조부가 믿음이 아주 강한 분이어서 양가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제 8살일 뿐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아이디어가 많다. 이제 슬슬 풀어 놓으려 한다고 했다.

1차 적으로 오는 8월 25일부터 열리는 서울 리안갤러리 개인전에서 보여 줄 계획이다. 친자연적인 소재와 나무, 자연 등의 모습을 전사한 영상과 함께 행위 드로잉이 들어간다.

선생님은 실험성이 강하시니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

오늘날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 모던의 경향을 뛰어넘는 시대가 됐으니, 이제 맘 놓고 시도할 것이다. 미친놈 소리 들을 일만 남았다(웃음).

작가의 이름을 단 미술관이 아직 국내에 없는데, 앞으로 미술관에 대한 구상도 필요하겠다.

그러면 좋죠. 나의 온갖 자료들을 거기서 다 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4년 개인전 할 때 드로잉이나 기타 자료들을 자료관에 줬다. 그런데 자료관에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 미술관에서 자료가 많은 분이 박서보 다음에 당신이라고 한다. (예를들어) 신체항이라는 작품을 만든다면 수십 개의 드로잉을 한다음 작품이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할 때 영국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어느 여류미술인이 와서 <한국과 파리 비엔날레> 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작품 ‘신체항’에 대해 프랑스와 북유럽의 신문과 미술전문지들의 기사 실린 것들이 다 나와 있다. 지금도 현대미술관에 가면 그 논문을 볼 수 있다. 내 작품의 오브제가 자연인데 유럽 사람들이 자연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엔날레 끝난 일주일 후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신체항'의 흙 속에 파란 풀들이 나와 있어 나도 무척 감동했다. 그게 밀짚을 섞어 쓴 것이다.

파리 비엔날레 갈 때 딱 3개의 주소를 갖고 갔다. 그중 하나는 홍대 교수를 지내신 한묵 선생이었고 또 하나는 김창열 선생이다. 김창열 선생은 내가 배재고등학교 미술실에 있을 때 조용익 선생을 만나러 온 적이 있는데, 내가 그린 수채화를 보고서는 「어, 저거 누가 그린 거야. 배재 대단하네」라고 칭찬하여 인연이 생기게 됐다. 당시 조용익 선생은 배재고 미술 교사였고, 김창열 선생은 가깝게 있던 이화여고의 미술 교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고등학교 때 벌써 국전에 입선했다. 그 당시는 수채화로는 입선하기 힘든 시대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미술이론이나 철학 등의 미술 과정을 이미 고등학교 때 마스터 했다. 손이 해어질 정도로 그렸으니까. 뚝섬 근방에서 퍼포먼스도 일찍이 했고, 그러니까 미술의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간판 따러 대학에 간 것이다.

▲인터뷰 질문을 집중해 듣고 있는 이건용 작가
▲인터뷰 질문을 집중해 듣고 있는 이건용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고등학교 때 김창열 선생의 주목을 받은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실험적인 수채화였는데 도심을 그렸다. 막 쓰러질 것 같은 빌딩을 그렸다. 아침 등교하기 전 좀 일찍 6시에 나와서, 이젤을 갖고 명동, 태평로 등 도시 건물들을 그렸는데,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교통순경이 이제 그만해라 할 때까지 그렸다. 중2 때부터 프랑스 문화원, 미국문화원, 남산의 괴테 하우스 등 다 뒤지고 다녔다. 잭슨 폴록 등 화가의 작품만 아니라 독일의 작가 피터 한트겐, 프랑스 문화원의 앙띠 로망 소설 등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나는 비타민은 하나도 안 먹는다. 다른 먹는 약도 없다. 저러다 갑자기 쓰러진다고 우리 집사람은 오히려 걱정한다. 저기 저 사진이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오프닝 때 했던 퍼포먼스인 「달팽이걸음」 이다. 이게 체력이 뒷받침 안 되면 못한다. 달팽이 걸음 걸으면서 양손으로는 계속 드로잉 하고 발바닥으로는 계속 지워 나가면서 흔적을 남긴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가

회화라는게 긋는 것과 지우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람도 필요 없는 것은다 지워버리고, 물감으로도 지우고 필요한 것만 남긴다. 달팽이걸음은 「그리는 것과 자기 몸이 지우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구상 그림도 잘 그렸다고 들었다.

잘 그렸다. 요즈음도 심심풀이로 구상을 그리고는 있다. 군산대학에 있을 때 생활은 항상 어려웠는데, 선배들이 전주에서 구상전을 한번 하라고 했다. 전주에서 하니 서울 사람들 모를 거라고 구상전 하라고 했는데, 그 전시 한 번도 안 했다. 장미꽃 그려주면 사 준다는 사람도 있었다.

올해 8월 리안갤러리 전시 이외에 중요한 전시 계획과 주관처는.

10월에 파리에서 개인전이 있다. 313프로젝트에서 주관한다. 파리 유학한 한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인데, 파리 외에도 한국에도 3곳에 갤러리가 있다. 내년 7월부터는 뉴욕 페이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있다. 그리고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가 코로나 등 현지 사정으로 연기가 됐는데 곧 재개될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가 느끼는 특별한 소회는 「세상은 몸으로 이루어졌다/몸은 장소를 빌림으로서 몸이 몸일 수 있다」 라는 이건용의 몸과 장소 이론이다. 앞으로 이 몸 이론이 문화예술의 각 분야에서의 세계관을 바꾸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물론 이 생각은 유물론이나 유심론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몸이 영과 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간과해 왔던 우리의 몸에 대해서 다시 깨닫는 계기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