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육완순, 그녀에게’- 전설을 완성한 제자들의 승리
[이근수의 무용평론]‘육완순, 그녀에게’- 전설을 완성한 제자들의 승리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8.10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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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완순(陸完順, 1933~2021)이 고인이 되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날이 7월 23일이었다.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 유행병 때문에 영결식조차 못한 채 고인을 떠나보내야 했던 제자들이 꼭 1년 만에 추모 공연을 올렸다. ‘육완순, 그녀에게’(7.21, 아르코 대극장)에 모여든 관객들로 로비와 객석이 술렁였다. “춤을 춰야 해, 지금 춤을 추지 못하더라도 춤과 같이 살아야 해” 영상이 들려주는 육성이 실제로 88년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온 고인의 기억과 겹치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공연이었다. 

신창호의 ‘그녀에게’가 공연의 문을 연다. 한예종 재학생 10명이 게스트로 출연하여 1963년 안무작품인 ‘Basic Movement’를 원형대로 재구성한다. 신창호는 육완순이 설립한 현대무용진흥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예종 교수고 한예종은 미국에서 돌아온 육완순이 국내에 처음 도입한 마사 그라 함(Martha Graham) 테크닉을 정식교과목으로 가르치는 학교다. 흰 상의에 검정 바지를 입은 출연자들의 민첩하고 역동적인 춤사위가 60년 전 이 땅에 현대무용의 씨를 뿌렸던 고인의 푸른 꿈과 용기를 되살려낸다. 

‘초혼(招魂)’은 소월의 동명 시를 텍스트로 육완순이 직접 춤춘 1965년 작품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어지는 서정적인 시 귀와 함께 고인은 춤추던 생전 모습 그대로 영상으로 살아난다. 2018년 서울무용제 개막공연에 초청된 마지막 무대, 이문세가 낭송하는 시의 운율을 따라 나이를 잊은 그녀의 몸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며 움직이는 시가 되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해준 작품이었다.

‘흑인영가’는 추모 공연 총연출을 맡은 박명숙을 비롯하여 안신희, 반주은, 김원, 김희진, 이미경, 김영미 등 7명이 출연한다.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할을 맡았던 무용가들이 대부분이다.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이 부르는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가 배경음악이다. 엄마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 혹은 태어난 땅을 떠나 강제로 실려 온 흑인 노예들의 절망감은 든든했던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슬픔을 반영하는 구슬픈 음악이 검은색 의상으로 통일된 무용수들의 혼이 담긴 춤이 되어 무대에 구현된다. 안신희가 재구성한 1963년 초연작인 ’흑인영가‘는 60년 전 작품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 세련된 작품이었다. 

가식 없는 기획과 혼이 담긴 춤이 주는 깊은 감동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는 1973년 초연 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공연되는 명실상부한 고인의 대표작이다. 앤드루 웨버의 록 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를 원작으로 예수의 마지막 7일간의 행적을 춤으로 구성했다. 공연은 전 막 중 세 파트를 보여준다. 사모하는 마음을 예수에게 전달하고 싶은 막달라 마리아의 애절한 솔로, 제자들과 함께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예수의 처절한 솔로,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앞에서 춤추는 군중들의 절망과 슬픔이 격정적인 군무로 펼쳐진다. 1997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200번째 공연에서 마리아와 예수로 춤추었던 이윤경과 최두혁이 솔로를 맡고 SAC(Seoul Art College) 무용단원 들이 군무를 맡은 여전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2013년 ‘육완순의 현대무용 50주년 페스티벌’(아르코 대극장)에서 선보인 ‘아직도 최고의 날을 꿈꾼다’가 이윤경, 장은정의 재구성으로 펼쳐진 후 에필로그 ‘영혼의 불꽃’이 추모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양정수 예술감독의 안무로 하정애, 최청자, 이정희, 박명숙, 남정호, 정의숙, 한선숙, 황문숙, 안신희, 김양근을 비롯한 39명의 내로라하는 무용가들이 대극장 무대에 모두 올랐다. 고인의 꿈과 예술정신을 기리는 제자들의 합력이 아름다운 춤이 되고 불꽃처럼 터지는 극적인 영상과 조화를 이루어낸 장대한 퍼포먼스였다. 육완순은 평생을 춤과 함께 살다가 이 땅에 현대무용의 씨를 뿌리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후 홀연히 사라져갔다. 

그녀는 창의적인 무용가였으며 헌신적인 교육자였고 제자들의 공연마다 빠짐없이 참석했던 열렬한 관객이었다. 스승을 향한 그리움을 진솔하게 보여준 추모 공연은 그 자체가 제자들이 온몸으로 쓴 편지이며 추도사다. 행사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인사말, 업적소개, 추도사 등 모든 요식 절차를 제외한 깔끔한 기획이 인상적이었다. 자녀들을 통해 부모교육이 드러나듯 스승의 품격은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55분의 짧은 시간에 6개 작품을 담아내면서 오직 춤만을 관객들에게 보여준 추모 공연은 스승의 전설을 완성한 제자들의 승리였다. 이제 모두 고인을 홀가분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