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안무가 전미숙, 정적인 내면에 숨겨진 뜨거운 실험의 아이콘
[Culture Interview]안무가 전미숙, 정적인 내면에 숨겨진 뜨거운 실험의 아이콘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8.10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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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현대예술의 대중화, 억지 맞춤이 아닌 공감 이끌어야
현대무용 대중화 이끈 LDP, 초석 다져…“스스로 찾은 길이 정답”
“98년부터 함께한 한예종, 긴장감 주는 소중한 존재”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진보연 기자/김재성 사진기자]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1923년 작곡한 ‘결혼(Les Noces)’은 러시아 농민들의 민속의식에서 채집된 민요와 결혼가사의 인용으로 탄생했다. 스트라빈스키가 말하는 ‘결혼’은 버진로드를 가득 울리는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처럼 낭만적이거나 축복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탄식과 기도의 주제로 구성된 음악 안에는 결혼의 노동, 생산, 사회적 의무가 무겁게 예고된다.

▲전미숙 무용단 ‘Talk to Igor 결혼, 그에게 말하다’ ⓒ모다페2021
▲전미숙 무용단 ‘Talk to Igor 결혼, 그에게 말하다’ ⓒ모다페2021

안무가 전미숙은 스트라빈스키가 ‘결혼(Les Noces)’이라는 곡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경험했을 편견과 저항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사랑보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오늘날 결혼 생활의 정서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시대를 앞선 도발로 기존의 관념을 해체한 스트라빈스키에게, <톡 투 이고르(Talk to Igor)>라는 움직임으로 새로운 질문을 건넸다.

<톡 투 이고르>를 비롯한 그의 작업 대부분은 일상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양면성, 그 위의 주제의식이 긴밀하게 이어진다. 공간적 무대개념과 탁월한 음악적 해석, 논리적인 안무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무대와 하나가 되게 한다. 

안무가 전미숙은 자전적 이야기를 모두의 경험으로 돌려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안무가이다. “다른 주제는 깊이 있게 알지 못 해서 내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라고 겸양을 표하지만, 개인적인 소재가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뷰 중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전미숙 교수 ⓒ김재성 사진기자
▲인터뷰 중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전미숙 교수 ⓒ김재성 사진기자

이화여대와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 컨템포러리 댄스스쿨에서 수학한 전미숙은 국내 '현대무용계 대모' 육완순의 제자다. 1981년 현대무용 탐(TAM)이 창단되면서 안무가와 무용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8년 『세계현대무용사전(International Dictionary of Modern Dance)』에 등재됐다. 같은 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로 부임해 현재까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무용원장에 2005년과 2019년 두 차례 임명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BOW>, <Talk to Igor_결혼 그에게 말하다>, <아모레, 아모레 미오>, <가지마세요>, <반갑습니까>, <What's Going on>, <아듀, 마이 러브>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중견 안무가로서의 중심과, 온전한 노력으로 구축해온 춤 세계를 더욱 튼튼히 하고 있다. 전미숙무용단을 이끌면서 LDP무용단 책임고문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한예종 실기과 출신들이 2001년 창단한 LDP(Laboratory Dance Project)는 예술성을 바탕으로 현대무용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꼽힌다. 신창호, 차진엽, 이용우, 김판선, 김성훈, 김보라, 김재덕 등 걸출한 무용가들을 배출했으며, 무용계를 넘어 일반 관객에게까지 사랑받으며 대중적 수용력을 높여왔다. 전미숙 교수는 LDP가 온전히 젊은 무용수들의 무용단으로 자리하길 바랐다. 동료인 미나유 교수와 함께, 자립을 돕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봤다. 2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젊은 무용가’ 집단 LDP 뒤에는, 학생들의 활동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전미숙 교수의 고집이 있었다. 

현대예술, 현대무용이 꾸준히 안고 있는 숙제 중 하나가 바로 ‘대중의 참여와 관심’이다. 흔히들 대중적이려면 예술성을 덜고 상업성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미숙 안무가는 억지로 무언갈 지우거나 더하기보다 그가 해왔던 대로 그저 대중 속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팬데믹 이후 급변하는 시대를 마주한 예술가들이 지난 4월 대전예술의전당의 ‘2022 스프링아트페스티벌’에서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춤’을 선보였다. 전미숙 안무가 역시 모다페(MODAFE) 공식 초청으로 이 무대에 올랐고, 예술과 토론이 더해진 ‘거의 새로운 춤(Desalto Quasi Novus)’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대전에 이어 성남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거의’ 새로운 창작을 통해, ‘완전히’ 빠르게 변하는 우리 사회와 세대, 문화를 춤으로 표현하는 전미숙 안무가를 만나, 현재에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물었다.

지난 4월 대전예술의전당 스프링페스티벌에서 <거의 새로운 춤>으로 대전 시민들과 만났다. 지역 문예회관과 예술가의 협업이 흔한 작업 형태는 아닌데,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학교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안에서의 작업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지방과의 협업’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계획 역시 없던 일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 땐, 남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작업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에 대해 항상 고민하지만, 이에 대한 결과가 매번 나올 순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신작을 선보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전예술의전당과의 협업, 그리고 신작을 소개하게 된 것은 모두 상황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인 셈이다.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회장이 처음 나를 찾아와 대전과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참여를 제안했을 땐 거절했었다. 대신 좋은 분들을 소개해드리마 말씀드렸다. 그런데 중견 이상의 연령대 무용가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거듭 연락을 주셔서 함께하게 됐다.

원래는 ‘아모레, 아모레 미오’라는 작품을 새로운 버전으로 선보이려 했다. 그런데 대전 측에서 이전의 작품을 디밸롭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창작 작품을 강조하더라. 버전업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면 참여를 안 했을 거다.(웃음) 이미 참여한다고 말을 마친 상태라 돌이킬 수 없었고, 그 때부터 신작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 같다. 

▲안무가 전미숙은 ‘거의 새로운 춤’ 첫 장이 마무리 된 후 무대에 올라 창작자로서의 자전적 고백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무가 전미숙은 ‘거의 새로운 춤’ 첫 장이 마무리 된 후 무대에 올라 창작자로서의 자전적 고백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트&사이언스’라는 큰 틀이 정해진 것부터 여러 면으로 기존의 작업 방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에,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아트&사이언스’라는 주제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의도해서 작품을 만들진 않았다. 내가 하는 무용과 테크놀로지, 사이언스의 결합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내놓을만한 작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할 땐 과학을 염두하고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 꼭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십 수 년 전부터 예술과 영상, 과학 기술 등의 결합은 있어왔다. 그건 지금까지의 연속이지 새로운 예술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경향들을 관찰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AI, VR 같은 소재들이 포함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작품의 제목부터 궁금증을 유발한다. ‘거의’ 새로운 춤이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문화예술계 전체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겪었다. 무용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기화된 전 세계적 비극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202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현대무용 교수진과 학생들은 유의미한 실험과 시도, 비평적 관점과 해석들이 응축된 <거의 새로운 인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다큐의 내용과 이번 작품이 유사점도 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 이를 모티브로 한 제목을 짓게 됐다.

우리는 늘 진행의 한 순간에 서있다. 이와 동시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에 가장 직면해야 하며, 특히 현대무용가는 그런 숙제를 더 많이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창작자가 아무리 고민을 한들 누군가가 이와 동일한, 아니면 비슷한 생각을 안했겠나. 어쩌면 ‘거의’라는 건 면피 혹은 빠져나갈 구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보며 관객들도 생각할 여지가, 폭이 조금은 여유로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이번 작품의 차이를 꼽자면?

작품의 시작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술가들이 고민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갈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본 관객들이 오히려 이전의 작품들보다 더 많은 공감을 해주셨다. 무용을 전공하는 젊은 학생들은 나의 세대의 고민을 공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는데 공연을 통해 공통분모,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좋았다. 현재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이 ‘어려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겪는, 세대를 막론하는 문제들이구나 서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아울러, 무용을 전공하지 않는 분들은 무용가로서의 저보다 중년 여성으로서의 저에게 많이 공감해주셨다. 한 여성의 지나고 있는 삶의 모습으로 공감대가 생겼던 것 같다. 

현대예술, 현대무용이 꾸준히 안고 있는 숙제는 ‘대중의 참여와 관심’이다. 흔히들 대중적이려면 예술성을 덜고 상업성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비롯해 내가 했던 몇 작품을 통해, 대중들이 현대무용이라는 장르에서 바라는 건 대중성을 겨냥해 흥미와 오락성을 가미한 작품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현대예술에서 억지로 대중성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건, ‘이런 작품이 있다’라고 알리는 것이었고, 이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전미숙 교수 ⓒ김재성 사진기자
▲전미숙 교수 ⓒ김재성 사진기자

대중들이 전미숙의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이 말하는 이야기가 곧 관객들의 이야기인 작품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이야기를 작품으로 다루다보니, 자연스레 그 안에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포함된 것들이 녹아나는 것 같다. 처음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평론가 김태원 선생님의 글에서 나를 ‘페미니스트, 표현주의적 연기자’라고 이야기하시는 걸 발견했다. 사실 처음엔 둘 다 전혀 공감이 안 됐다. 지금은 남녀성비가 많이 비슷해지고 있지만, 내가 무용을 할 당시만 해도 여성이 90%였다. 여자가 월등히 많았던 터라 페미니즘에 대해 따로 고민해 볼 생각도 못 했다. 제대로 된 지식과 깊이가 없다면 작품으로 섣부르게 다루면 안 된다는 주의라, 잘 모르는 주제는 작품으로 만들 생각도 안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작품들이 나의 이야기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내 이야기를 했을 뿐, 작품에 의도적으로 페미니즘적 시각을 반영하고 여성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평론을 통해 내 작품에 나도 모르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되레 이를 통해 내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됐다. 문화적ㆍ사회적 현상과 결합하여, 예술가의 무의식에 무엇이 있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일. 항상 나 작품과 춤에 대해 가혹하던 나지만, 다른 이들을 통해 나도 모르던 내 무의식 속 가치를 깨달을 때면 평론이 예술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소중한지 절감하게 된다. 

현대무용계에 최초로 팬덤을 탄생시킨, 한예종 졸업생 중심의 무용단 LDP(Laboratory Dance Project) 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81년 이화여대 무용과 대학원생들에 의해 창단된 현대무용 탐(TAM)을 통해 안무가와 무용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예종 용원 실기과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98년이다. 이후 졸업생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평소 아이디어가 참 많으신 미나유 교수님이 ‘무용단을 만들자’는 제안을 처음 하셨다. 학생들과 만나기 전, 탐에서의 경험이 있으니 나를 대표로 하는 무용단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모든 대학에는 동문 단체들이 있었다. 그 단체들은 보통 교수님 밑에 있다 보니 결속력도 좋고 든든한 울타리도 있고, 짧은 시간에 급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탄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탐에 오래 있으면서, 교수님 아래에 만들어진 조직은 일단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굉장히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탐은 교수님에 의해 만들어진 무용단이 아니었기에 괜찮았지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다수의 단체들은 지도자가 정한 방향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 수동적 형태였다. 이런 시스템에서 오래 머물다보면 무용가 개인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도 떨어지고 두려움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질 단체는, 조금 성장 속도가 느리고 힘들더라도 절대 교수가 대표를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뒤에서 이들의 활동을 서포트하는 조력자로서만 존재하길 바랐다. 무용단이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학생들을 믿었기에 지금의 LDP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손에 모든 걸 맡겼고 그 결과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염려되는 부분은 있을 것 같다.

생각이라는 건 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지 않나. LDP를 생각하면 항상 난제가 남겨진 느낌이 있다. LDP는 개인의 무용단이 아니기 때문에 무용수들 안에서도 많은 안무가들이 나와야하는데, 그 점이 해결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걱정과 고민이 LDP만의 문제인지, 무용계 전체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김동규 대표에게 따로 묻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방향성에 대해 조금씩 가능성을 열어가고, 다름을 만들어가는 안무가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기대보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배움의 기회와 경험, 많은 공급이 있으면 배출도 많아야 맞는 것 같은데 왜 아닐까? 아이러니 했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면,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해답이 빨리 나오는 사회에 살다보니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 안무가들이 조금 더 나왔으면 좋겠다. 

사실 이제는 ‘새로움’ 보다는 ‘안정감’을 찾게 될 시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끊임없이 도전하게 되는 이유와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다른 어느 곳보다, 이 학교에서 있다는 것이 나를 늘 긴장하게 한다. 한예종에서 일하면서 학생들과 만나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느슨하지 않게 한다. 내가 보는 나는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정말 오랫동안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특히 한예종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 않나.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검열하고 질문을 던지면서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 아직 있는 것 같다. 

안무자마다 생각하고 풀어내는 방식이 전부 다르고 정답이 없지만, 현대무용이라는 건 문제의식을 계속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책을 보고, 혹은 일상에서 고민했던 것들을 최종적으로 작품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야한다는 생각만 일단은 가지고 있다. 

2005년과 2019년, 한예종에서 무용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처음 맡았을 땐 자의적이라기 보단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맡게된 게 컸다. 이후 두 번째 기회는 자발적인 의사 표명이었다. 학교를 잘 이끌어보겠다는 사명감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한예종 무용원이 지난해 25주년을 맞았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모든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우리의 할 일을 참 잘 해놓은 것 같다. 그리고 또 다시 도전의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인데, 나와 뜻이 맞는 몇 사람하고만 이야기해봤자 바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외국에서 무용을 배웠을 때와, 몇 년 전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는 30년이 흘렀음에도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린 그럼 다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커리큘럼까지 당장 제시하긴 어렵겠지만, 함께 논의하고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무용과 함께한 세월이 쌓일수록 작품의 소재나 주제의식도 변화할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자면?

20대 때는 춤이 나의 발언을 표현할 수 있는, 굉장히 도발적인 표현 방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웃음) 그런데 자꾸 반전 혹은 메시지에 치중해서 표현을 하다 보니 갈수록 상술적인 마인드로 변하는 건 아닌가 하는 경계를 하게 됐다. 반성을 하고 다시 방향성을 재정립한 끝에, 나다운 것이 가장 발전적이고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으레 생각하는 예술가로서의 상상력이 정말 부족한 사람이다. 없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있는 것을 잘 표현하자는 주의였다. 그때부터 나에게 있는,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준 것에 비해 훨씬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서 좋은 무용가, 훌륭한 안무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될 친구들이 내 제자가 된 것이다. 내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학생들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더불어 ‘절대 나처럼 하지 말라’고 말한다.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신창호 교수하고 19~20살 차이가 나고, 학생들하고는 거의 40살 이상 차이가 난다. 10년에 강산이 바뀐다고 하지 않나. 요즘은 그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때문에, 나와 학생들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두려움 없이 저지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아울러, 무용에 얽매이지 않길 바라게 되는 것 같다. 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해서 이 학교에 온 친구들이지만, 그것이 이유가 되어 끝까지 무용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용의 시작이 자발적인 학생들은 사실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선택권은 거의 없지 않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학한 학생들도 많다. 출발의 계기가 어찌됐든 이곳까지 왔다면, 무용을 통해 그 정도로 행복한 걸로 만족해도 된다는 뜻이다. 춤이 족쇄가 되지 않길 바란다. 전공자가 아니라도 춤은 우리에게 저마다 다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존재하기 위해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많이 돌아본 후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무용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기억에 남는 거 자체가 어찌 보면 부담이다. ‘내가 과연 기억에 남을 만한 인간인가?’ 하는 의문도 함께 품게 된다. 그래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안 갖기 때문에 오히려 초조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