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책, 마음의 길 내기5. 마음 밭의 이야기들, 길 위에 쓴 편지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책, 마음의 길 내기5. 마음 밭의 이야기들, 길 위에 쓴 편지
  •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2.08.1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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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쓴 편지/이순원 지음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필자의 작업실 근처 자주가는 커피집이 있다. 사진 작업을 하는 주인장이라 무심코 올려둔 책마저 감각적이다. 코너에 있던 책을 우연히 집어 들었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가. 이 번호에 글을 올리려 이순원 작가의 장편 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읽고 있었는데 마침 한 권을 꺼낸 것이 이순원 작가의 아주 오래전 산문집이었다. 요즘은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라 얼떨결 주인장에게 책을 빌려서 나왔다. 이순원 작가는 현재 김유정 문학촌 촌장으로 작가의 역량을 넘어 문화예술기관 전문경영자로서 강원도 최초의 공립문학관. 김유정 문학촌을 활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57년 강원 출신으로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장편 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외에 수색 그 물빛무늬, 그대 정동진에 가면, 오목눈이의 사랑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순수, 은빛 낚시 등이 있으며 글쓰기를 단 하루도 멈추지 않는 진정한 창작자이다. 한국일보에 오랫동안 연재된 글을 묶은 ‘길 위에 쓴 편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듯 이야기를 하듯 매우 간결한 구조임에도 삶의 감동이 오롯이 묻어있다.

 

길 위에 쓴 편지

 

대관령 서쪽 오지에서 자란 아저씨는 학교 문턱에 가본 적이 없다. 당연히 글씨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그 아저씨는 오직 본인의 이름 석 자만 알았단다. 꼴머슴으로 일을 하는 아저씨가 처음 글씨를 배우게 되었는데 바로 ‘금초’였다. 여름이면 소 키우는 집에서 자기 집 논둑의 꼴을 못 베어가게 하려고 팻말을 적다 보니 필요에 의해 금초부터 쓰게 되었다. 다음의 글씨는 한동네에 사는 어떤 누나의 이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배우고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을 배운 다음부터 일하러 가는 곳 아무 길에나 ‘아저씨 그 누나 금초’라고 어눌하게 쓰기를 시작했다. 길 위 어디든 낫과 호미로 글을 썼는데 그 누나를 좋아한다는 아저씨의 마음을 삐뚤빼뚤 표현한 덕에 그 누나는 예전보다 더 쌀쌀맞게 아저씨를 대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지만 아주 간절한 사랑의 편지였을 것이다. 온 땅에 온 마음으로 쓴 아저씨의 사랑 고백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살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었는가? 온 정성을 다할수록 어눌해지고 당신의 부족함이 속속 드러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한 적이 있었는가? 사랑의 대상이 사람만은 아니다. 실제로 그 아저씨에게 누나의 이름을 가르쳤던 이순원 작가는 책 속 서문에 ‘나는 과연 그 아저씨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가?’ 돌아보곤 한다고 표현했다. 필자 역시 자문한다. 나는 과연 절실한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가? 산문집 ‘길 위에 쓴 편지’의 실린 글들은 따듯한 여운이 남는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순원 작가의 어릴 적 이야기다. 어려운 시절, 객지에 나가 공부하는 아들이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생활비 송금을 요청하면 부모님이 통장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넣어주는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씩은 부모님께 안부편지 겸 생활비 송금을 요청하느라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저는 부모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먼저 안부를 전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라고 말하며 하숙비 요청을 했다고 한다. 때로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다름이 아니오라’의 본론을 말하지도 못하고 그냥 안부편지를 보낼 때도 있었다는데 일주일 후 어쩔 수 없이 송금을 요청하는 ‘다름이 아니오라’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커서 보니 오히려 돈을 벌면서는 부모님께 편지 한 통을 쓰지 않는 불효를 저지르며 살았다는 짧은 글이다. 현시대는 손글씨를 적어서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학생의 신분이라면 부모님께 도움을 받는 것도 당당한 시대이다. 힘든 상황의 아이들마저 정부 지원이나 장학제도가 있으니 부모님께 송구한 마음은 예전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편지만큼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매체는 없다. 편지를 받는 사람만큼 쓰는 사람도 따스해진다. 필자는 올초 남해 출장을 갔다가 푸치니의 시 한 편을 적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냈다.

 

내 마음 밭의 작은 이야기들

 

우리의 삶 속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무수하게 숨어있다. 어떤 일들은 예정에 없이 사람을 놀라게 하고 방황하게 만들지만,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 밭에 이야기들이 가득할 것이다. 이순원 작가의 산문집 ‘길 위의 쓴 편지’는 한 단락당 20줄도 안 되는 짧은 글인데 묘하게 감동을 주며 저마다의 색으로 여운을 남긴다. 지난 추억을 세상 밖으로 꺼내며 이순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떠나라. 내 마음 안의 작은 이야기들. 세상을 돌고 돌아보다 큰 이야기로 따듯하게 만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