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서대문형무소에 울려퍼진 금기의 역사…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현장프리뷰]서대문형무소에 울려퍼진 금기의 역사…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8.11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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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소설 원작, 소프라노 강혜명 예술총감독
9.3~4,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2024년 일본 공연 예정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은 작은 슬픔이다. 그들에게는 4·3의 처절한 슬픔보다는 흰 눈 위의 얼어 죽은 새를 슬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1970~80년대 금기로 여겨지던 제주 4·3을 공론장에 올리는 데 기여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창작오페라로 제작됐다. “4·3 영령들을 위한 진혼곡이 됐으면 한다”는 원작자 현기영의 바람이 담긴 공연이다.

▲오페라 ‘순이삼촌’ 출연자들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야외마당에서 ‘이름없는 이의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신국, 강혜명, 김신규, 최승현, 장성일, 김성국.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시가 공동 기획하고 제작한 <순이삼촌>은 2020년 제주 초연 후 지난해 제주에서 두 차례,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한 차례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일부 개작을 거쳐 다음달 3일과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공연 개막에 앞서 지난 1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제작표회에서 현기영 작가는 “논의가 기피됐던 4·3 사건이 집단적 몸짓과 음성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니 후련하다”라며 “오페라를 통해 전국을 넘어 세계에 4·3 사건을 알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제작발표회는 출연 배우들의 식전 공연으로 막을 올렸다. 배우들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야외공간에서 ‘예나제나 죽은 마을’, ‘어진아’, ‘이름 없는 이의 노래’ 등 주요 아리아 3곡을 열창했다.

▲오페라 ’순이삼촌’ 속 강혜명 소프라노 ⓒ제주4·3평화재단 제공

극의 주인공이자 예술총감독을 맡은 강혜명 소프라노는 “제주의 예술가로서 사명감을 느껴 이 작품을 만들게 됐다. ‘순이삼촌’을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며 무작정 현기영 작가님을 찾아갔는데, 작가님께서 거절이 아닌 나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해주셨다. ’신중히 결정하라’며 몇 번이나 재고할 기회를 주신 끝에 (작품 제작을) 허락하셨다”라며 제작 배경을 전했다. 

현 작가는 “40여년 전 이 소설을 썼을 때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학생들이 이 책을 읽으면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이에 소설로서의 <순이삼촌>은 다소 내성적이고 갇혀있는 면이 있었는데, 오페라로 그 외침이 방방곡곡 울리고 집단적인 몸짓이 되니 웅장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라며 “이번 서울 공연은 4·3 사건이 대한민국의 심장부까지 진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이 자유롭지 않은 만큼, 추후에는 미국에서도 공연되길 바란다”라는 생각을 밝혔다.

총 4막으로 이뤄진 공연은 1948년 제주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집단 학살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그린다. 제주교향악단과 제주합창단을 비롯해 전원 4·3 희생자 유족들로 구성된 제주4·3평화합창단, 극단 가람, 밀물현대무용단, 어린이클럽 노래하자춤추자 등 230여명이 출연하는 대작이다.

오페라는 1978년 발표된 원작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 흐른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상수가 8년 만에 고향 북촌리에 돌아와 순이 삼촌의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1막 ‘태사룬 땅을 밟다’가 시작된다. 2막 ‘북촌, 이승과 저승 사이’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948년, 군인들이 동네 사람들을 집결시켜 총구를 겨눈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일주도로변 네개의 ‘너븐숭이 옴팡밭’에서 300여명이 한날한시에 떼죽음을 당하는데, 이때 싸늘하게 식어버린 두 어린 자녀를 발견하고 착란에 빠진 순이 삼촌이 ‘광란의 아리아’를 부른다. 3막 ‘마침내 해제된 소개령’은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로 돌아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비통한 이야기다. 4막 ‘넋은 넋반에 혼은 혼반에’는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1979년 섣달, 북촌 옴팡밭이 배경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순이 삼촌이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간 그날, 그 밭에서 깊은 회한에 잠긴 채 생을 마감한다.

▲오페라 ‘순이삼촌’ 제작발표회 현장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이번 공연에는 제주합창단과 제주교향악단으로 이뤄진 제주도립제주예술단이 함께한다. 제주교향악단을 이끄는 지휘자 김홍식은 “제주교향악단 단원 중에는 실제로 4·3의 아픔을 겪은 가족을 가진 단원들이 있다”며 “모두 제주의 아픔을 연주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공연에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정훈 작곡가는 “심혈을 기울였는데 결과물이 너무 좋게 나와 기분이 좋다”라고 전했다. 그는 관객들에게 명확한 대사를 전달하기 위해 ‘징슈필’을 택했다. ‘노래의 연극’이라는 의미의 징슈필은 18세기 독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 형태로, 가사와 대사를 적절하게 섞어 공연한다. 대사를 연극처럼 대화체로 구사하다가 극적인 장면에서는 음악으로 몰입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가해자’인 고모부 역할을 맡은 바리톤 장성일은 초연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그는 “극 중 고모부가 악역으로 등장하다 보니 관객들과 더불어 함께 출연하는 제주4·3평화합창단 단원분들도 한동안 저를 외면하셨다”라며 “이해가 가면서도 말 붙여주는 사람이 없어 서럽기도 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놔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프롤로그 테너로 정호윤·이정원, 순이삼촌으로 강혜명, 상수 역으로 테너 이동명·김신규, 고모부 역으로 바리톤 장성일·김성국, 큰아버지 역으로 바리톤 함석헌·심기복, 할머니 역으로 메조소프라노 최승현, 길수 역으로 바리톤 양신국·고세빈이 출연한다.

내달 3일과 4일 양일간 진행되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4·3특별법 개정안 통과와 4·3희생자 배상·보상 등을 이끌어낸 국민적 관심과 격려에 대한 보답의 마음을 담았다. 국민들에게 바치는 헌정공연으로 열려 이틀간 전석 무료로 공연을 진행한다. 공연 티켓은 1인당 4매까지 유선으로 예약 가능하며 현장에서 수령해 선착순 입장 할 수 있다.

한편, ‘순이삼촌’은 내년 4·3 75주년을 맞아 다른 지역에서도 공연을 준비 중이며, 2024년에는 일본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