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모호한 것들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모호한 것들
  • 윤이현
  • 승인 2022.08.19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1

중학교 1학년 무렵, 우리 집엔 일곱 식구가 살았다. 엄마 아빠와 우리 세 자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는 할아버지와 반려견까지. 집이 이렇게 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누가 할아버지께 침대를 내어드릴 것인지 하는 문제로 매일 언니들과 암투가 벌어졌다. 그 전쟁에서 나이가 어린 나는 매번 패배했다. 당시 엄마의 직장은 경기도에 있었다. 일곱 식구 끼니를 챙기고 서울에서 통근하려면 적어도 새벽 5시엔 일어나야 했다. 쌓이는 피곤만큼 아빠와의 싸움도 잦아졌다. 결국, 엄마는 회사 근처에 방을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두려웠다. 사랑하는 엄마로부터 한 발짝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리지 않고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아니 어쩌면 포화 상태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에 훌쩍이던 밤, 딱딱한 바닥에 이불 한 장 펴고 낡은 MP3를 틀었다. 그리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언니들의 잠꼬대 소리 이불을 걷어차고 끙끙대는 아빠의 한숨 소리가 난장 같은 불협화음을 만드는 이 복잡한 집에서, 숨을 죽이고 누워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엄마를 따라 경기도로 간다면, 생애 처음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곳은 서울보다 복잡하진 않을 테니 어쩌면 자전거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학교를 마치고 퇴근한 엄마와 단둘이 치킨을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럼 다리와 날개를 우리끼리 실컷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티브이도 마음껏 보고, 내 침대를 양보할 일도 없을 거야. 엄마도 이젠 조금 편해질 거야. 주말마다 엄마랑 단둘이 쇼핑도 하고 돌아오는 길엔 분식점 앞에 나란히 앉아 떡볶이랑 어묵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 뭐 이런 생각을 했다. 이날 들었던 음악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다. 비록 상상이 현실이 되지는 못했지만.

 

2

몇 년이 흘러,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지만 우울증과 섭식장애를 극복해보려 송파의 한 미술치료 센터를 다닌 적이 있다. 치료가 끝난 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누군가 내 등을 톡톡 쳤고, 깜짝 놀라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봤다. 함께 치료를 받는 언니였다. 마흔 살, 두 아이의 엄마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뼈밖에 남지 않은 몸. 내 등에 닿던 그녀의 아주 얇고 딱딱한 손가락 촉감을 기억한다. 우리는 각자의 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서로의 절망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반복되는 구토로 치아가 많이 녹아 최근 치료를 받았다며 힘없이 웃었다. 미소 너머로 반짝반짝 빛나던 그 인공 치아의 형태를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고 고백하던 목소리와 떨리는 눈동자의 색도 온전히 떠올려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치료는 종료되었다. 나는 그저 그런대로 살고 있다. 작은언니는 반려견을 데리고 분가했고, 큰 언니는 네덜란드로 유학하러 갔다. 할아버지는 행사가 있지 않은 한, 서울에 올라오시지 않는다. 따라서 침대를 양보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치킨을 시켜 먹을 수 있다. 더는 부모님의 분쟁도 없다. 이 집엔 그토록 바랐던 고요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음악을 즐겨듣고 양치를 할 때마다 그 이름 모를 언니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가끔은 입 밖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열네 살 소녀의 상상력에 불을 지펴주었던 그 음악이 여태 좋은 이유를, 그 모호함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엔 이유 모를 것들이 많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음이 떠나는 일도 참으로 모호하다. 불안하다가도 금세 기대에 부푸는 것도, 살고 싶다가도 죽고 싶어지는 이유도. 일곱 식구가 살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 시절을 가득 채워주었던 음악을 사랑하는 것처럼. 엄마와 둘이 오롯이 시간을 보낼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었던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어지는 것만큼이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아도 누군가의 하얗고 무심한 치아만큼은 기억나는 것처럼. 세계엔 감히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함이 있다. 당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