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뷰] SeMA, 《춤추는 낱말》展 “‘아시아’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현장리뷰] SeMA, 《춤추는 낱말》展 “‘아시아’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8.30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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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 서소문 본관, 9.1~11.20
‘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논의 조망
서울, 방콕, 반둥, 뭄바이 등 활동하는 14명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인간중심, 남성중심, 서구중심 등 지금까지 주류라고 여겨졌던 가치들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때다. 역사적으로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아시아’에 대한 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창작 또한 예전보다는 더 많이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제이슨 위(Jason Wee), 의결을 위한 토론장 예행연습, 2019-. 리브레토 퍼포먼스, 의상, 폴리에스터 패널에 프린트, 스트링, 가변설치, ed. 1 + 1 AP.  파라 사이트 《커튼》(2021)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작가, 파라 사이트 (사진=SeMA 제공)

서울시립미술관(관장 백지숙) 서소문본관에서 9월 1일 시작해 오는 11월 20일까지 개최되는 《춤추는 낱말 Scoring the Words》는 동시대 아시아 현대미술에 주목해 기획됐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4년부터 미술관이 진행해오고 있는 ‘비서구 지역 전시 시리즈’의 일환이다. ‘서구’가 아닌 지역에서 이번에는 그 영역을 좀 더 ‘아시아’로 한정시켜서 접근해본다. 또한, 전시는 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이슈를 하나의 주제로 내세워 국가, 인종, 민족으로서 아시아의 정체성을 규명하거나 재현하기보다, 아시아 특유의 풍토적인 경험과 개별적인 특질들을 살펴봄으로써 아시아적인 사유와 성질을 유추해나간다.

▲30일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두토 하르도노(Duto Hardono), ‘인 하모니아 프로그레시오(In Harmonia Progressio)’를 위한 변주와 즉흥연주, 2016-2017. 제시된 악보에 따른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개별 작품이 만드는 한편의 ‘시’

《춤추는 낱말》 전시 역시 올해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의제인 ‘시(Poetry)’를 함께 논의한다. 이번 전시는 ‘시(Poetry)’를 공동의 심상을 담은 대중의 노래이자 저항 언어로 해석하며, 아시아를 둘러싼 문화적·집단적 현상을 조망할 수 있는 매개로 바라본다.

이러한 접근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가적 작가를 내세워, 아시아의 정체성을 확정 짓고 다른 지역권과 구분하는 방식과 다른 태도를 지닌다. 미술관은 인종과 국적에 따른 작가 선정이 아닌 아시아에 기반을 두고 혹은 아시아를 둘러싼 논의에 천착해온 창작자들과 함께 전시를 구성한다. 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개별의 논의와 소재들을 개별적으로 접근하면서, 또한 각각의 작품이 《춤추는 낱말》 전시 안에서 어우러지고 표현하는 공통의 감각에 집중해본다. 개별적이고 상징적인 ‘시어’가 ‘시’를 통해 구현하는 심상을 SeMA는 ‘작품’과 ‘전시’에 대입해 선보인다.

▲사샤 카라리취(Saša Karalić), 우리가 더 이상 정치 이야기를 안 해도 돼서 너무 좋습니다, 2016, 스틸컷.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후원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몬드리안 재단, 네덜란드. 이미지 제공 작가. (사진=SeMA 제공)

전시 기획의 글은 “지옥은 타임라인에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나는 마법의 방패를 걸치려 하네/ 우리는 우리 자리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다수가 된다/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이라는 짧은 시 형태의 글로 시작된다.

기획의 글에선 “여기 한 편의 시가 있다. 사실 이 시는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전시 《춤추는 낱말》에 등장하는 작품에서 발췌하거나, 작품과 연관해 생산된 작가의 말을 선별해 재배열한 것이다. 이 시는 각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의 맥락을 함축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맥락의 시공이 교차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라며 《춤추는 낱말》이 지향하고 있는 ‘시’에 대한 발화법을 설명한다.

▲출라얀논 시리폰 작가가 작품<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2014-2019)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개별적이면서 함께하는 ‘아시아’에 대한 발화

《춤추는 낱말》에는 아시아에 기반을 두고 작업해오고 있는 다국적 창작자 14명(팀)이 참여한다. 서울을 기반에 두고 활동하고 있는 강서경, 황예지와 브리스톨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영인을 비롯해 다나카 고키(교토), 티파니 샤(홍콩 출생, 뉴욕 활동), 출라얀논 시리폰(방콕), 좀펫 쿠스위다난토(욕자카르타), 헤라 찬(샌프란시스코 출생, 암스테르담 활동)&에드윈 나스르(베이루트 출생, 암스테르담 활동), 사샤 카라리취(암스테르담 활동), 캠프(뭄바이) 등의 작가, 기획자, 연구자, 음악가들이 초대됐다.

전시는 각자의 작가들이 마주하고 있는 ‘아시아’라는 세계에 대한 작품들로 이뤄져 있다. 작가들을 자신이 살아오고,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를 은유하는 작품을 창작했다. 또한, 자신이 마주한 세계뿐 만 아니라,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국가들도 함께 약동할 수 있는 창을 열어 보인다.

출라얀논 시리폰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2014-2019)는 콜라주 작품으로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던 2014년 5월 22일부터 총선이 이루어진 2019년 3월 24일까지 발행된 일간지를 활용하여 제작한 1,768개 작품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에는 2014년에서 2019년 사이 매우러 22일에 해당하는 작품 59점이 전시돼 있다. 작가는 “태국에서 쿠데타가 처음 발생했던 날짜 22일에 해당하는 작품을 선별했다. 당시 태국의 군사 정부는 국민들에게 ‘행복을 돌려주겠다’라는 말을 하며 통제를 이어갔고, 그 과정 속의 매일을 콜라주로 기록했다”라고 설명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2014-2019)는 한 시대의 기록인 동시에, 군부에 의해 통제되는 뉴스와 정보들의 부조리함에 대한 작가의 대항이고 민주주의를 향한 작가의 염원이 담긴 실천이었다. 작품은 소셜 미디어 시대에서 정보가 유통되고 소통되는 방식과 시민들이 정부와 같은 거대 집단에 대항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찰로도 이어진다.

▲홍영인(Young In Hong), Prayers No. 1-39, 2017. 면에 자수(인조견사) 악보, 사운드 설치, 각 43 × 48 × 4.5 cm, ed. 13 + 1 AP. 이미지 제공 작가, 주영한국문화원.
▲홍영인(Young In Hong), Prayers No. 1-39, 2017. 면에 자수(인조견사) 악보, 사운드 설치, 각 43 × 48 × 4.5 cm, ed. 13 + 1 AP. 이미지 제공 작가, 주영한국문화원. (사진=SeMA 제공)

홍영인의 <Prayers No. 1-39> 는 면에 자수로 기록한 악보 작품이다. 홍영인은 섬유,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거대 서사에서 배제된 개별 주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Prayers No. 1-39>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은 사진 아카이브에서 시작한다. 사진들은 근대화 시기 한국의 도시 풍경과 자유를 위한 저항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작가는 특정한 사건과 상황을 담은 사진 속에서 임의적으로 선택한 부분적인 실루엣을 자수를 통해 아주 간소한 선으로만 남겨 담아냈다. 이 과정 속에서 기록 사진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는 하나의 ‘사진-악보’로 재기술된다.

<Prayers No. 1-39>가 전시되는 공간에선 이 악보로 연주한 홍영인의 피아노곡이 재생된다. 작은 실선으로 기록된 악보와 피아노의 선율을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 개인의 세밀한 서사를 상징하고, 그 개인의 서사가 가지고 있는 응축된 에너지를 상상하게끔 한다. 《춤추는 낱말》 전시 기간 동안에는 자수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탈위계적 연습(Meta-hierarchical Exercise)>(9월 2일 ~ 9월 4일, 11월 19일 ~20일, 오후 2시와 4시, 2층 복도)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홍영인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작업을 행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는 이분화된 역사라고 본다. 인간 중심, 남성 중심의 역사고 이 것을 작품을 통해 수평적으로 다시 쓰고 비언어적인 형태로 발화하는 노력을 담았다”라며 퍼포먼스와 자수 악보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홍영인 작가가 <탈위계적 연습(Meta-hierarchical Exercise)> 퍼포먼스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관람객 참여 유도, 확장되는 경험 제공

SeMA의 이번 전시는 비서구권 지역 중 ‘아시아’에 주목하면서, 그 의미를 함께 만들어 나가고 확장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개별의 서사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공통의 의제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도 하고, 이를 창작자에서 관람객으로까지 확장하는 시도 ‘접근점’도 선보인다. 시가 쓰이고, 읽히고, 확산되어 노래가 되면서 다수의 의식을 잇는 언어가 되듯이, 새로운 운동을 위한 부분적인 연결 혹은 행동을 도모하기도 하고,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의 관계를 오가는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접근점’은 퍼포먼스, 강연, 작가와의 대화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 및 자료와 프로그램 일정은 미술관 공식 SNS를 통해서 제공될 예정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 만든 오디오 가이드 ‘함께 부르는 노래’다. 미술관은 사전에 모집된 참여자들, 미술관 전시기획팀,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이 함께 전시와 작품에 대해 나눈 질문과 생각을 담아 오디오 가이드를 제작했다. 전시장 내 작품 설명문과 함께 제공돼 작품을 매개로 다양한 감각적 논의를 제안한다.

▲좀펫 쿠스위다난토(Jompet Kuswidananto), 천국에서, 그들, 2018. 샹들리에, 드럼, 마스크, 가변설치. 아라리오 갤러리 《시차적응법》(2018)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작가, 아라리오 갤러리.  (사진=SeMA 제공)

전시는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역사와 균열, 균형에 대해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외부에서 지칭되거나 규정된 아시아의 정체성이 아닌, 우리 내부에서 생성되고 있는 의미를 함께 주목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평범한 일상은 가끔 세계를 단순하게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곳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춤추는 낱말》은 세계를 흔들고 있는 무수한 변화의 지점들을 담고 있다.

《춤추는 낱말》 전시는 사전예약 없이 관람 가능하고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도슨팅 앱을 통해 음성으로 작품 및 프로그램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전시 관람 일정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sema.seoul.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