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아주 쓸모없는 재능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아주 쓸모없는 재능
  • 윤이현
  • 승인 2022.09.0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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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무더운 여름날, 친구들과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프랑크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밀가루의 텁텁함과 자극이 강한 감미료 맛이 전부였지만 그 시절엔 그만큼 맛있는 간식이 없었다. 마지막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다가, 문뜩 언니 방 돼지 저금통이 떠올랐다. 어쩌면 500원짜리 동전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동시에 곧 언니가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거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더운 바람결을 타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윤슬처럼 빛나는 동안 언니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집 앞 삼거리 육교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언니를 태운 학원 버스가 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쉬운 마음에 어금니 사이에 낀 프랑크 소시지 조각 하나를 혀로 찾아 핥짝이며 다시 친구들이 있는 문방구 앞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순간 장면 하나가 눈앞에 그려졌다. 신호 대기 중인 택시의 유리 창문으로 천 원짜리 한 장이 밖으로 날리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5초 뒤, 바람을 타고 날라 온 지폐 한 장. 원래 내 것이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그것을 잡아 들었고 그날 나는 프랑크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은 계속되었다. 한 번은 중학교 2학년 무렵, 친구와 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행사 마지막에 선물 추첨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각자 추첨권을 한 장씩 나눠 받았다. 그때 내가 받은 번호는 585번이었다. 설마 되겠어?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앞에 서 있었는데, 순간 눈앞에 쌓인 20kg들이 쌀 한 포대를 받고 행복해하는 내 모습이 데자뷔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초 후, 585번은 그날의 럭키 번호가 되었다.

나의 예지력은 불행을 감지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촉으로 수차례 비밀을 찾아내기도 하고, 강아지에게 물리는 미래를 예측한 지 불과 몇 초 뒤에 실제로 얼굴이 물려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다. 신이 내게 불행의 냄새를 피할 능력까지 주시진 않았지만, 삶의 크고 작은 사건을 감지하는 능력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

하늘을 난다거나, 시공간을 비트는 대단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겐 타고난 쓸모없는 재능이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신발 끈을 풀리지 않게 묶어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물건을 금속 탐지기보다도 잘 찾아낸다. 이렇듯 우리는 저마다의 조잡한 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여기 그 누구보다도 하찮은 재능을 가진 인간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천명관 작가의 단편소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속 한 남성을 보자. 그는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어디서든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 겔러. 이스라엘 출신인 그는 스스로가 초능력자임을 자임하며 숟가락을 구부러뜨리는 재주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런 그를 동경했던 남자는 우연히 숟가락 구부러뜨리기에 성공한다. 자신이 마술사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난 남자는 학교 친구들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려 보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나 그 기묘한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좋아하던 여학생 앞에서도, 회사 신입직원 환영회 자리에서도 그는 숟가락을 구부리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뒤 망신만 당한다.

그러던 사이 나이를 먹고 세상에 치일 대로 치인 그는 잠시나마 숟가락에 대한 집착을 놓게 된다. 동시에 자신의 입사 동기인 미야모토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딸과 아내로부터도 그는 무시 받기 일쑤다. 가족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다시 한번 숟가락을 들어보지만, 여전히 그것은 꼿꼿하게 서 있을 뿐 도대체 꿈쩍도 하려 들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쫓겨나다시피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무능한 남자는 싫다며 그를 집에서 쫓아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가 미야모토와 불륜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는 노숙인 쉼터에서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구부러뜨려 본다. 드디어 성공이다. 그러나 저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자원봉사자는 다가와 말한다. 이런 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저기 앉은 사람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나 노숙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 얘기는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와 묘하게 닮았고 또 묘하게 다르다. 그는 숟가락 나부랭이를 구부리는 능력을 가졌고, 나는 그보다 좀 더 우아하지만, 결국엔 아픈 결말까지는 피할 순 없는 슬픈 능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오늘도 몇 발자국 걷다 보면 손쉽게 풀려버릴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 것만큼이나, 가치는 있으나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재능. 물건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지만, 종국엔 또 잃어버리게 되는 이 하찮은 재능. 세상엔 이런 쓸모없는 재능들은 참 많다. 남자가 그토록 동경했던 유리 겔러는 끼와 스타성으로 이 하찮은 능력을 이용해 큰돈을 벌었을진 몰라도, 우리 대다수는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가치는 어처구니없는 재능과는 무관할 테니. 그래서 삶은 슬프다.

오늘도 누군가의 신발은 풀어지고, 물건은 숨어버린다. 요행과 불행은 비가 오고 날이 개듯 찾아오며, 구부러진 수저를 퍼야 할 날도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슬픈 우리지만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설령 인생을 바꿀 수 없는 아주 작은 힘이더라도 말이다. 작은 일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으며 소신껏 살아가야 한다. 오늘도 엄지에 잔뜩 힘을 넣고, 다음 먼지를 털고 신발을 묶고 전날 밤 잃어버린 이어폰을 찾아 집을 나서는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이 부여잡고 있는 쓸모없는 초능력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