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융합형 춤의 선구자, 정순영
[성기숙의 문화읽기]융합형 춤의 선구자, 정순영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9.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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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에 심취한 공학도, 창작·비평·문화운동 전개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며칠 전 대구에 계신 원로무용가 김기전 선생께서 전화를 하셨다. 특유의 힘있는 카랑 카랑한 목소리가 실로 반가웠다. 80대라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건한 목소리였다. 지금 구미로 출발한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구 출신 안무가 김용철 천안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작품 ‘업경대’를 구미에서 공연을 하는데 축하 겸 격려차 간다는 말씀이었다. 

원로무용가 김기전 선생은 대구, 경북지역은 물론 전국의 무용현장을 누비는 것으로 유명하다. 10여 년 전까지는 남편이자 무용평론가인 정순영(鄭淳永 1928~2012) 선생과 늘 함께했다. 2012년 정순영 선생 작고 후 지금은 혼자서 이렇듯 전국의 무용현장을 찾는다. 

무용현장에 대한 선생의 품평은 예리하고 날카롭다. 때론 조언을 넘어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응원과 격려, 애정어린 관심의 발로이기에 서운해 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신기한 일이다. 노익장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와 정순영

정순영은 1928년 전라도 광주에서 서산 정씨(瑞山 鄭氏) 후손으로 태어났다. 8남매 중 장남이었다. 지역의 명문 광주서중학교를 마치고 서울공대 섬유과를 졸업했다. 1949년 일본 유학파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제3기생으로 입소하면서 무용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함귀봉은 서울 명동유치원 자리에 조선교육무용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로 제한하여 신문에 연구생 모집광고를 냈다. 신문에 실린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연구생 모집광고는 해방직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부유하는 젊은 지적 세대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대 최고의 젊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명문대학에 재학중인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후일 한국 문화예술 발전의 최전선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우선,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조동화는 동아일보를 거쳐 월간 『춤』지를 창간한 언론인으로 한국춤평단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연세대생 차범석은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예술행정가로 한국공연예술사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한편, 고려대에 재학중이던 최창봉은 문화방송 사장을 지냈고, 197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신) 사무총장 시절 대한민국무용제 창설에 산파역할을 했다. 그밖에 고려대생 김경옥은 무용평론가로 일가를 이뤘고, 중앙대생 정병호는 중앙대 교수, 문화재위원을 역임하며 한국무용학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신무용가 조택원의 아내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김문숙 또한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출신이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연구생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정순영이다. 그는 서울대 공대 재학시절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딛으면서 전문적인 무용학습기를 거친다. 정순영은 훗날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대하여, ‘해방된 한국의 카오스’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정순영은 당대 두 명의 문화지성에게 크게 영향받았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설립자 함귀봉과 연구소에서 무용이론을 가르친 문철민이 바로 그들이다. 정순영은 일본 유학파로 교육무용과 현대무용에 정통한 함귀봉을 통해 무용예술의 본질과 실체를 꿰뚫는 통찰력을 길렀다. 또 독일의 노이에 탄츠 이론에 토대한 문철민은 무용이론의 나침판 역할을 했다고 기억한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 경험을 통해 정순영은 문화의식이 발아되고 미의식이 개안되는 절호의 기회를 갖는다.

당시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오늘날 대학 무용과와 다름없었다.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세분화된 교과목은 퍽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예술학, 교육학, 무용사, 무용미학, 무용창작법실지, 무용해부학, 무용교수법, 무대조명론, 무대화장법 등 다채로운 교과목 구성이 실로 경이롭다. 이렇듯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해방이후 한국무용사에서 창작과 교육, 그리고 무용이론과 평론분야에 유의미한 역할로 기능했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의 학습 경험은 정순영의 무용활동에 귀한 자양분이 되었다. 정순영이 무용평론가 이전 창작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순영의 첫 작품은 1950년 11월 시공관에서 선보인 ‘평화의 섭리’로 기록된다. 1953년 11월 종군극작가단의 공연에  ‘인어의 전설’을 올렸고, 그에 앞서 8월 개최된 8.15광복 경축무대에 참여하여 ‘도학자가 본 서커스’를 안무하고 출연했다. 1950년대 말까지 꾸준히 현대무용 작품을 선보였다.  

‘山河億萬年’ _ 먼저 온 미래

1970년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산하억만년’(山河億萬年)은 정순영의 창작활동에 획을 긋은 수작에 속한다.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가 지원한 외국무용 부문 창작지원제도의 첫 수혜작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작품 ‘산하억만년’은 컴퓨터 시대 새로운 환경에 따른 인간의 내면세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초연 당시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20여년 앞서 컴퓨터를 소재로 안무를 한 셈이니 당시 기준으로 보면 분명 ‘먼저 온 미래’임에 틀림없다. 

‘산하억만년’을 통해 정순영의 공학도다운 진취적 발상과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대본과 안무, 연출 등 전문적인 제작시스템을 도입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작품제작에 참여한 호화로운 인적 구성도 이채롭다. 정순영이 공연 설계를, 대본은 강이문과 정순영, 안무는 정병호와 김기전이 맡았다. 강이문은 부산에서 활동한 무용평론가이며, 나주 출신인 무용학자 정병호는 정순영과 동향이면서 해방직후 조선교육무용연구소 동학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순영의 아내 김기전은 대구시립무용단 초대 단장을 지낸 현대무용가이다.  

정순영과 김기전은 1956년 결혼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두 사람은 1961년 대구 시내 국도여관 목욕탕 자리에 대구발레아카데미를 개설하여 무용의 저변확대와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함경도 함흥 출신 김기전은 대구 지역에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로 통한다. 1981년 대구시립무용단 창단을 주도하여 초대 단장을 지냈다. 대구시립무용단은 2012년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되기 전 현대무용 전공으로 구성된 전국 유일의 공공무용단체로 희소적 가치가 컸다.

정순영의 평론활동은 1990년대 중반 경성대 교수 은퇴이후 본격화된다. 초창기엔 주로 대구, 경북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점차 보폭을 넓혀 이른바 ‘전국구’ 평론가로 통했다. 현장 평론활동을 통해 모두 다섯 권의 평론집을 상재한 바 있다.   

첫 번째 무용평론집 『춤 추는 바보 춤 못추는 바보』라는 책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 세계적인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 조택원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집필한 『춤추는 바보』라는 책 제목이 연상된다. 실제 정순영은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에게 심취해 있었다. 

하나의 예로, 그의 이름에서 찾아진다. 정순영은 무용평론가 활동 이전에는 鄭漠(정막)이라는 예명으로 불렸다. 여기서 막(漠)은 石井漠(이시이 바쿠)의 이름 ‘漠’ 자에서 따온 것이다. 알다시피, 이시이 바쿠는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로 1920년대 초반 유럽에 유학한 인물로 우리나라에 서양 모던댄스를 전해준 인물이다. 창작활동 및 평론작업 근저에 배여 있는 정순영의 현대춤 지향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경계를 넘나든 팔방미인, 그리고 今是昨非

무용평론가 정순영은 대구, 경북지역 무용의 산증인이자 문화운동가였다. 아내 김기전과 함께 설립한 대구시민문화연구소, 스페이스 콩코드, 사단법인 다다 등은 대구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인생의 절반은 공과대학 교수로, 그리고 절반은 무용창작과 문화기획자, 무용평론가로 활동했다.  

정순영은 공학과 창작, 비평의 경계를 넘나든 팔방미인(八方美人)이었다. 호남 출신으로 일찍이 영남지역에서 활동했고, 공학도이면서 예술가로 불렸고, 또한 이론과 실기를 겸비했다. 예술현장에서는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젊은 세대와 적극 교감하고 소통하는 등 세대융합을 꽤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융합형’ 인생을 살았던 셈이다. 

말년에 열과 성을 다한 저서 『大邱 춤 60年史』는 유작으로 남았다. 800여 쪽에 달하는 책에는 대구지역의 60년 무용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꼼꼼한 자료수집과 치밀한 분석, 공학도다운 집요한 관찰, 그리고 특유의 집념과 열정이 깃들어 있다. 그의 무용철학과 업적을 새삼 되새긴다. 

한편, 선생은 다섯 번째 평론집 『Choom & Dance Review 觀舞記』 서문에 今是昨非(금시작비)라는 구절을 남겼다. 생각해볼 명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알다시피, 이 말은 중국 동진시대의 은거시인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등장하는 글귀다. 41세의 도연명이 팽택현의 지사(知事, 종 8품의 지방 하급관직)라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에 나온다. 

今是昨非, 무슨 뜻인가? 직역하면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는 의미다. 도연명이 스스로를 반추할 때 관직(정치)을 버리고 자연과 벗하는 지금이 옳고, 관직에 얽매어 정치의 길을 걸었던 과거가 잘못됐다는 깨달음이다. 세속과의 결별을 고하고 자연과 벗한 은거의 삶 속에서 비로소 참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정순영 선생 10주기를 맞아 선생의 던진 화두를 곱씹어 본다. 텅 빈 대지 위에 인간은 누구나 혼자 서 있는 것 아닐까.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면서,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