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제주 원혼들의 씻김굿, 예술로 승화시킨 역사투쟁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제주 원혼들의 씻김굿, 예술로 승화시킨 역사투쟁
  •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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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9월 3일과 4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피맺힌 제주 원혼들을 위한 씻김굿이자, 예술로 승화된 역사 투쟁의 열매였다. 이 날 공연은 제주 4·3의 비극이 지역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임을 확인케 해 준 의미 있는 무대였다.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 것은 1978년, 서슬퍼런 유신 시절이었다. 제주에서 3만명의 무고한 넋이 희생되고 3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조천읍 북촌리에서 토벌대는 주민 600명을 북촌 국민학교에 모아 놓고 이 중 400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들의 시신은 인근 옴팡밭에 어지럽게 널려진 채 까마귀밥이 됐다. <순이삼촌>은 이 학살 때 살아남은 여성이 30년 동안 정신신경증에 시달리며 생명을 부지하다가 결국 자살한 일을 중심으로 제주 4·3의 비극을 조명한 소설이다. 작가 현기영 선생은 이 작품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제 이 작품을 서울에서 오페라로 볼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쌓인 결과인지 아득한 느낌마저 든다.  

1999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첫 편인 제주 4·3을 제작하며 북촌리를 취재할 때 인터뷰를 약속하신 분이 취재진을 피해서 잠적해 버리신 게 기억난다. 비극의 기억을 살리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게 분명했다. 누구든 인터뷰를 해야겠기에 옆집 문을 두드렸는데, 김석보 선생이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당시 19살이던 그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지만, 11살, 9살, 7살이던 세 동생이 현장에서 죽었다. 제주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물로 울 수도 없는 통한의 세월을 어떻게 오페라에 담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순이삼촌>은 우리 손으로 우리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 소중한 무대였다.  

주역 순이삼촌을 맡고 대본·연출까지 책임진 소프라노 강혜명 등 주요 성악가들, 제주교향악단, 제주합창단, 4.3평화합창단, 밀물현대무용단, 극단 가람,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메트 오페라합창단 등 230여명의 인원이 무대를 채운 스펙터클이었다. 최정훈의 음악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음악어법을 구사했고, 시종일관 힘과 열정이 넘쳤다. 원작 소설에 없는 노랫말을 새로 써서 다채로운 정서를 맛보게 해 준 성의 있는 프로덕션이었다. 합창 ‘이름없는 이의 노래’는 제주 4.3이 우리 모두의 상처라는 점을 절절히 느끼게 해 주었다. 

9월 3일, 4일 오페라 <순이삼촌> 서울 공연 대성황 

1막 큰아버지, 고모부, 길수, 상수의 사중창은 같은 곡에서 사람마다 다른 가사로 노래하도록 하여 오페라의 특성을 잘 살렸다. 2막 토벌대와 피해주민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도 입체적인 효과가 뛰어났다. 3막 어린 길수와 상수가 배고파 하며 부르는 이중창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오페라의 분위기를 쇄신하여 활력을 불어넣었다. 관객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은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제주 사투리를 적절히 사용하여 공감을 일으켰고, 서북청년단 출신인 고모부의 평안도 사투리가 제주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는 점도 잘 표현됐다.  

현기영 선생이 직접 내레이션을 맡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비행기로 불과 50분 거리”인데, 강요된 침묵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는 점을 대비시킨 원작의 내용을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과음도 적절히 활용했다. 옴팡밭의 처절한 풍경 위에 울리는 까마귀 소리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자막은 단정했다. 특히 영어 번역이 훌륭해서 외국인이 보아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프로젝트 화면은 다채로웠고, 큰 무대를 알뜰하게 잘 활용하여 꽉 찬 느낌을 주었다. 

▲오페라 ’순이삼촌’ 커튼콜 ⓒ이채훈
▲오페라 ’순이삼촌’ 커튼콜 (사진=이채훈 제공)

오페라에서 마이크를 사용한 건 이례적이었다. 대중성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상당수 오페라 매니아들에게는 실망스러웠을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이란 큰 공간에서 부득이 취한 조치였겠지만, 마이크 음향이 귀에 다소 부담을 준 게 사실이다. 어떤 장면은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가 아니라 미리 녹음한 MR을 사용했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막 순이삼촌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무용 대목의 음악이 압권이었는데, 이게 라이브 연주가 아닌 것은 의아했다. 

아무래도 비극적인 내용이라 관객들의 정서에 무겁게 다가온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체 구성을 좀 더 간결하게 처리하면 어땠을까 싶었다. 2막 끝부분, 순이삼촌의 오열과 아기의 웃음소리가 오버랩되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했는데, 이 장면에 이어지는 북촌 국민학교 장면을 생략하고 2막 피날레 합창으로 바로 넘어가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3막, 4막은 드라마가 없고 단절된 여러 장면들을 모자이크처럼 연결해 놓은 구성이었다. 폐허 위에 돌성 쌓는 장면은 간결하게 처리하고 옴팡밭에서 순이삼촌이 죽는 장면에 집중하면 극적 효과를 높일 수 있었을 것 같다. 피날레 합창은 합창단이 무대 위에 안 올라왔는데, 다 함께 등장하여 대단원의 마무리를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2020년 제주에서 초연한 뒤 수차례 수정을 거듭해서 완성도를 높여 왔다고 한다. 제주 4·3의 의미를 강조하는 교훈적 내용을 줄이고 관객들이 스스로 감동할 수 있게 두는 쪽으로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갈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인사, 현기영 선생이 무대에 올라오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작가에게 존경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