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나비의 꿈>, 윤이상을 되살린 감동의 무대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나비의 꿈>, 윤이상을 되살린 감동의 무대
  •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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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인 음악은 빼어나, 대본은 개선 여지 남겨
▲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서울오페라앙상블이 <나비의 꿈>을 3년만에 무대에 올렸다. 2017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에 초연했고, 2019년 개작하여 공연했고,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올 9월 6일~7일 구로아트밸리에서 다시 관객 앞에 선 것이다. 군부독재가 저지른 동베를린 사건의 야만을 뚫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한 그의 예술혼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열정을 다했고, 이는 관객들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갈길을 잃은 20세기 서양 음악에 인간의 온기를 불어넣은 윤이상, 그가 등장하는 작품이니 유럽 무대에서도 주목받을 잠재력이 충분해 보였다. 

이날 단연 돋보인 것은 작곡가 나실인의 음악이었다. 그는 “윤이상의 고매한 정신, 진실함, 따스함, 인류애를 존경한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그의 마음이 음악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윤이상이 연주한 첼로를 떠올리게 하는 1막 첫머리의 첼로 솔로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첼로에서 서양 주법인 글리산도와 동양 기법인 농현을 활용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고문 장면의 끝부분에서 금관의 불협화음은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추가한 천상병과 이응로의 이중창에서는 푸가 기법을 활용하여 참신한 느낌을 더했다.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였지만 현악과 피아노, 목관과 타악기를 다채롭게 안배하여 화려한 음색의 팔레트를 구사했다. 전체적으로 서정미와 비장미가 넘치면서 너무 무겁지 않게 음악의 흐름을 잘 조절했다. 

출연 성악가들이 최상의 기량을 발휘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충분한 리허설이 보장되지 않는 여건 때문이었겠지만, 음악을 완전히 체화하여 자연스런 발성과 앙상블을 이루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오케스트라도 최선을 다했지만 디테일에서 다소 산만한 대목들이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공연에서 더 완성도 높은 연주를 기대한다. 무대 연출과 프로젝트 영상은 3년전에 비해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공연할 때마다 개작과 수정을 거듭하여 완성도를 높여 왔다. 하지만 대본은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아 보였다. 윤이상과 함께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을 등장시켜서 동베를린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는데, 음악과 그림과 시를 통해 역사의 비극을 조명한 효과는 있었지만 관객들의 관심을 분산시켜서 윤이상의 내면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된 측면이 있었다. 새로 작곡하여 삽입한 이응로의 아리아는 드라마의 흐름에 녹아들 수 없는 원천적 한계 때문에 아쉬움을 남겼다. 

▲오페라 ’나비의 꿈’ 커튼콜 ⓒ이채훈
▲오페라 ’나비의 꿈’ 커튼콜 ⓒ이채훈

동베를린 사건의 피해자들이 아무 죄도 없이 독재의 폭력에 희생됐다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시대의 어둠과 고난을 뚫고 예술을 꽃피운 윤이상의 숭고한 예술혼이 아닐까. 이수자 여사의 <내 남편 윤이상>에 인용된 그의 육성에서도 그의 예술혼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통영의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다.”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 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녹여 낸 윤이상의 아리아를 하나쯤 삽입했다면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고결한 예술가의 모습을 음악에 담아야 이 오페라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자꾸나”라는 가사가 10차례 넘게 나왔는데, 이런 표현은 윤이상의 참모습을 오독하게 만들 우려가 있으므로 손질이 필요해 보였다. 윤이상에게 나비는 자유롭게 날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 혹독한 현실이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며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려 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간첩, 국가전복과 같은 정치적 조작에 대해서 “허튼 소리 말라! 모두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외치고 싶었다고 윤이상 스스로 밝히지 않았는가.

▲오페라 ’나비의 꿈’ 커튼콜 ⓒ이채훈
▲오페라 ’나비의 꿈’ 커튼콜 ⓒ이채훈

1막과 2막의 무대를 똑같이 세 칸의 감방으로 한 것은 너무 단조롭다. 2막에서는 이응로 화백과 천상병 시인의 분량을 줄이는 대신 윤이상의 내면에 집중하며 예술혼의 성장을 보여줄 수 있도록 무대도 바꾸는 걸 검토하면 좋겠다. 2막에서는 서대문 교도소에서 <나비의 미망인>을 작곡하는 윤이상의 내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도록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강서 고분의 사신도가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윤이상의 <영상>을 들려주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작곡하는 장면과 뉘른베르크 초연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나비의 미망인>의 한 대목, 가령 “백년광음은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고, 오늘 봄이면 내일 꽃이 시든다.”는 합창이나 장자가 방랑길을 떠나고 아내가 울며불며 따라가는 장면을 보여주면 어땠을까 싶다. 무대에서 재연하는 게 기술적으로 어렵다면 프로젝트 화면과 MR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윤이상에 대한 오마주를 삽입하면 오페라 <나비의 꿈>이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전체적으로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비의 꿈>을 무대에 올린 모든 스텝과 출연진에게 경의를 표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갈채를 받을 만큼 더 훌륭한 프로덕션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