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밀양검무의 명인, 雲心
[성기숙의 문화읽기]밀양검무의 명인, 雲心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10.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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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최고의 무용스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기생 운심(雲心)은 18세기에 활동한 최고의 무용스타였다. 그가 밀양 출신으로 밀양검무의 명인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 있다. 우선,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글에 보인다. 박제가는 1769년 20세때 장인 이관상(李觀祥)이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 영변으로 가서 과거공부를 했다. 그의 장인은 사위를 위해 명산으로 알려진 평안북도 묘향산을 유람하도록 주선하였고, 특히 악공과 기생을 동행시켜 풍류를 즐기도록 배려했다. 실로 풍류를 아는 멋쟁이 장인이었던 셈이다. 

박제가는 묘향산 유람 말미에 이르러 사찰인 용문사에서 펼쳐지는 가무를 관람했다. 여기서 운심의 제자가 춤추는 검무를 보았고, 그 감회를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에 남겼다. 글의 마지막 “근세의 검무, 곧 검무는 밀양의 여자 운심이 유명한데 이 춤을 추는 사람은 대개 운심의 제자(近世舞劒, 稱密陽姬雲心, 此盖弟子)”라는 구절에서 운심이 바로 밀양 출신임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운심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운심이라는 이름은 영·정조시대의 유학자이자 성대중(成大中)이 집필한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온다. 여기에 “밀양기생 운심이 한양으로 뽑혀왔는데, 그는 검무로 온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밀양 출신 운심은 한양에 뽑혀 올라갈 정도로 검무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 시절 운심이 어떻게 중앙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른바 선상기(選上妓) 제도에서 찾아진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장악원에 소속된 여령(女伶) 만으로는 정재공연을 모두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 지방의 교방청 소속 기생들을 선발하여 궁중연향에 참여시켰다. 밀양 교방 소속 운심은 조선후기에 구현된 선상기 제도의 최대 수혜자가 아닐까?

선상기로 뽑혀 궁중연향에 참여한 기생들은 행사가 끝난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회향한 기생들은 궁중연향에서 추어진 정재를 지방 교방에 전파하여 교방정재의 미학적 진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운심은 귀향하지 않고 한양에 머물며 자신의 재능을 발현할 기회를 엿본다. 그만큼 스스로의 예술에 자신이 있었던 게다. 

운심이 선상기로 참여했음은 신국빈(申國貧)의 『태을암문집(太乙菴文集)』 권2 「응천교방죽지사(凝川敎坊竹枝詞)」의 기록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선, 응천교방(凝川敎坊)이라는 단어에서 당시 밀양에 교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밀양 교방의 풍류문화를 접하고 남긴 시편 중 “雲心, 一名煙兒”라는 표현에서 운심이 일명 ‘연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운심은 스물 살 때 선상기로 선발되어 한양으로 올라갔고, 검무를 춤춰서 귀족 자제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운심의 검무 솜씨는 가히 호서의 모시라든가, 송도의 비단을 화대로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빼어났다고 전한다.  

한편, 운심이 18세기 문신 윤순(尹淳)의 소실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성대중은 문집 『청성잡기』에서 운심과 윤순의 러브스토리를 다루었다. 윤순은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예조판서와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는 등 관직 프로필도 화려하다. 시문은 물론이요 산수와 인물화, 화조 등에도 재능이 있었다. 특히 그가 남긴 서예 작품에는 중국의 소식(蘇軾), 동기창(董其昌) 등 명필가들의 서체가 투영되어 있는데, 중국서법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전하는 밀양 출신 검무의 명인 운심과 당대 서예의 거장 윤순과의 일화를 통해 최고 경지에 이른 두 예술가의 예사롭지 않은 교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윤순이 사랑하는 연인 운심에게 “너의 검무로서 나로 하여금 초서(草書)의 비결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자, 운심이 권주가를 부르며 윤순에게 술을 권했다. 술에 취한 윤순은 운심이 벗어준 비단치마에 중국의 대표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 주었다. 윤순과 운심, 두 명의 천재 예술가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당대 풍류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밀양검무의 명인 운심의 미(美)에 대한 추종과 집착은 광기에 가까웠다. 그는 천하의 명승지 역산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한 번 죽는 법,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더없는 만족이라는 이유에서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섬뜩한 전율이 느껴진다. 운심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미모와 예술에 대한 자존감이 컸다. 조선후기 한 시대를 풍미한 운심의 천재성은 이렇듯 남다른 성정과 예술적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밖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비롯 이덕무(李德懋), 이면승(李勉昇) 등이 운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밀양검무의 명인 운심은 당대 최고의 문화지성이자 지적 엘리트들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여러 문집에 소개될 정도로 그의 검무 솜씨는 탁월한 경지에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기로, 운심은 한국무용사를 다룬 전문서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때문에 다소 생소한 인물로 여겨진다. 운심을 이해하는데 한문학자 안대회의 연구는 좋은 길잡이가 돼준다. 조선후기 문집을 비롯 각종 사료를 촘촘히 살펴서 운심의 생애와 행적을 다뤘다. 인문적 사유의 넓힘과 동시에 창조적 영감을 안겨준다. 

정리해 보면, 밀양 출신 운심은 선상기로 뽑혀 궁중연향에 참여했으며 이후 귀향하지 않고 중앙무대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이르러 조선 팔도를 주유하면서 검무의 명인으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으로 추정된다.

알다시피, 검무는 조선후기 팔도의 교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운심의 밀양검무는 이검무(二劍舞) 형식, 즉 쌍검무(雙劍舞)로서 이는 조선후기 당대를 표상하는 뚜렷한 트렌트였다고 할 수 있다. 운심의 밀양 이검무는 조선후기 교방을 거쳐 일제강점이 권번을 통해 오늘로 전승되고 있다. 그 정점에 전통무용가 김은희가 있다.

김은희는 밀양검무의 유일한 전승자로 손색이 없다. 오랜 세월 밀양검무의 복원 전승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그의 남다른 열정과 집요한 탐구력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오는 19일 밀양문화원 주최로 밀양검무의 기원과 전승 및 문화유산적 가치를 주제로 학술담론의 장이 펼쳐진다. 이 자리에서 18세기 최고의 무용스타, 밀양검무의 명인 운심의 존재론적 의의에 대해 한층 진전된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