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한글의 날, 국악의 날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한글의 날, 국악의 날
  • 주재근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2.10.1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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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주재근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우리 민족의 음악 얼인 국악의 가치를 일반인들이 기억하고 국악인들이 화합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국악의 날이 국경일이 아니더라도 국가기념일이라도 되길”

10월 9일은 조선의 문화 성군 세종이 우리 민족의 언어 문자인 한글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경일로 한글의 날이다.

서울 광화문 거리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데 왼손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려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이 해례본 예의편 첫머리에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 뜻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라고 하여 한글 창제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반포할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나 관원들은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며 한글창제에 극구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군주의 도리’라 생각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이다.   

세종은 중국과 다른 것이 우리말 뿐만 아니라 음악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1430년 9월 11일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 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으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우리 음악인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세종 당시까지 만하더라도 궁중의 제례음악 뿐만 아니라 왕과 신하의 모여서 회의하기 전 조회(朝會)음악은 중국의 음악인 아악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의 의식음악에 국악 대신 서양음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종은 죽어서까지 중국음악으로 제례음악을 듣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제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세종은 석달 뒤인 1430년 12월 7일 다시 한번 조선의 음악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세종은 우리 민족의 언어 문자인 한글 창제 못지 않게 우리 민족의 음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고유의 표준음을 새롭게 정하고 중국에서 수입하였던 악기인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을 새로운 표준음고에 맞추어 제작하는 등 악기개량사업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세종 자신이 직접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발상(發祥), 봉래의(蓬萊儀) 등 신악을 창제하여 『세종실록』에 악보로 수록하였다. 조선왕조의 무공(武功)을 찬미한 정대업(定大業)과 문덕(文德)을 찬양한 보태평(保太平)은 후에 다소의 개정을 거쳐 1460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연주되고 있다. 이 종묘제례악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세종은 새롭게 창제한 한글로 조선 왕조의 창업을 노래 가사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인데 이 노래는 봉래의(蓬萊儀) 곡에 수록되었다. 세종은 중국음악과 조선음악이 다른 것은 중국의 제사음악은 1자1음으로 연주하는 단순한 음악이지만 조선의 향악은 1자를 여러음으로 길고 짧게 노래한다는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기보법인 율자보(律字譜) 대신에 음악의 길고 짧은 리듬을 나타낼 수 있고, 현악기, 관악기, 장구, 박, 노래 가사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해 내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업적 못지 않게 우리 민족의 음악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즐기고 이어갈 수 있도록 신악과 정간보 창안, 악기 개량 등 오늘날 국악이 바로 있게 한 큰 업적이 있다.

한글의 날이 1949년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알리고 국민들의 한글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해 국경일로 제정되었다가 1991년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한글날이 일반 기념일로 된 적이 있다. 2012년 한글날이 국경일로 재지정되는 데는 문화체육관광부 고 김혜선 서기관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어정책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 곳곳의 세종학당 확충과 한글박물관 개관, 한글정책에 대한 부처 의견 및 반대 전문가 의견 조율 등에 앞장서다 2015년 4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 민족의 음악 얼인 국악의 가치를 일반인들이 기억하고 국악인들이 화합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국악의 날이 국경일이 아니더라도 국가기념일이라도 되길 바래본다.

국악의 날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김혜선 과장님과 같은 헌신적 공무원과 전문가 등 해당 종사자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먼저인데 현실을 보면 한숨은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