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SIDance 2022 <춤에게 바치는 춤들>에서 본 ’유령들‘
[이근수의 무용평론]SIDance 2022 <춤에게 바치는 춤들>에서 본 ’유령들‘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0.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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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재료이고 주제며 언어가 된 무용가의 몸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이종호)가 설립되고 2년 후인 1998년에 시작한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가 25주년을 맞았다. 4반세기를 기념하는 올 축제의 표어는 <춤에게 바치는 춤들(Dancers for Dance)>이다. 무용이 춤으로 구성되는 예술임에도 춤이 빠진 무대를 보면서 공허함을 느끼던 차에 “춤 자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춤의 본연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 행사 의도가 뜻깊게 다가왔다.

김보라가 안무한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유령들’(Hauntology, 9.14~15, CJ토월극장)이 개막공연이다. 무용단 창단(2013) 이래 김보라의 일관된 관심은 여자의 ‘몸’이다. 사회적이거나 관념적인 주제들보다 자기 자신도 포함된 여성의 몸에서 그녀는 창작의 가치를 발견한다. 김보라가 그려내는 ‘몸’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다. 그녀에게 몸은 춤의 재료이며 주제이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언어가 된다. <소무>에서 그녀는 감각과 생식기관으로서의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한다. 남성에 의해 연주되는 악기이거나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몸이기를 거부하고 여자의 몸이 스스로 소리 내고 스스로 발광하는 독자적인 존재임을 주장한다. 성행위를 암시하는 관능적인 몸을 통해 세계를 움직이려는 대담한 욕망을 은밀하게 드러낸다는 것이 그녀의 과거 작품들에 대한 느낌이었다. 

여섯 명의 무용수(최소영, 김희준, 배진호, 정종웅, 이규헌, 김보라)가 무대 좌우에서 번갈아 등장한다. 한 사람이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으면 다른 무용수가 이를 입는다. 몸에 맞지 않은 듯 다시 벗어놓으면 다음 사람이 집어 든다. 누군가 소지품을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이 주워 드는 동작도 이어진다. 마이크를 입에 대고 그들은 자신만의 암호로 정체성을 표현한다. 소통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모습들이다. 안무가(김보라)도 그중 하나다. 

등 뒤에 드러나는 <BORA ART>란 로고만이 다른 출연자들과 그녀를 구별시켜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팀이 짜인다. 그들간엔 공통점이 있지만 모두가 서로의 다름을 안다. 김보라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안무가와 무용가, 무용가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까. 안무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무용수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지만, 과도한 통제는 무용수를 도구화하는 한계가 있다. 각자의 능력과 특성이 최대로 살아날 때 무대에서의 시너지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그 경계는 어디까지고 어느 것을 금지할 것인가. 

김보라가 유령(hauntology)의 영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경계선이다. 안무가가 무용수들 사이에 섞여 함께 입고 함께 벗고 함께 뛰면서 하나가 되는 것에서 김보라는 해답을 찾은 듯하다. 무용수들이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어던진다. 이윽고 그들은 모두 나체가 된다. 성적 대상으로 인식될 때 육체는 비밀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이지만 예술의 표현으로서 드러내는 몸은 당당하고 아름답다. 밝은 조명 아래 자연의 몸들이 김재덕의 음악을 만나 춤이 되고 춤이 된 몸이 자유롭게 무대를 누빈다. 무대엔 군무가 없고 무용수들은 각각 개성적인 춤사위를 마음껏 드러낸다. 

60분 공연을 마친 후 널브러진 옷더미들을 뒤로 하고 무대 앞에 선 무용수들 얼굴엔 생기가 넘치고 무언가를 이루어낸 듯한 후련함이 보였다. ‘소무’(2015)에서 출발한 여체의 탐구가 ‘유령들’(2022)을 통해 완성되고 그가 찾고 있던 낯선 아름다움의 본질이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운 몸에 있음을 발견한 것은 김보라의 자본일 것이다. 안무가와 무용수가 수직적관계가 아닌 수평적관계가 될 때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일치함을 찾아낸 것 역시 ‘유령들’을 완성한 김보라의 승리일 것이다. 이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김보라가 여자의 몸에서 더욱 확장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바란다.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 덴마크)의 ‘to come(extended)’(9,21~22, 토월극장)은 <Dancers for Dance>란 주제에 걸맞은 다른 한편의 해외 초청작이다. 2005년 초연작품을 60분으로 확장하고 은밀하게 벌어지는 사적인 섹슈얼리티에 자유롭고 당당한 무용수의 몸을 공개한다. 1부에선 몸 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푸른색 타이츠로 몸을 가린 14명 무용수들이 온갖 체위를 느릿느릿하게 실험하며 난교파티를 벌인다. 그들이 떼 지어 만드는 에로틱한 형상은 조각 작품을 보는 듯 시각적 조형미가 있다. 2부에서 타이츠마저 벗어 던진 그들은 숨김없이 나신을 드러내며 ‘싱싱싱(sing sing sing)’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무대를 누빈다. 몸이 춤으로 변신하는 순간이 ‘유령들’과 닮았다. 1999년 전연희, 박상희와 함께 뉴욕에서 돌아온 안은미의 ‘무지개 다방’을 보고 썼던 글이 떠오른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작품에서 무용가를 통해서 몸에 대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무용 의상들이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몸을 겹겹이 싸안아 답답한 데 비해 이 작품에는 무용가가 의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가 있다. 이사도라 덩컨은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은 나체’라고 말하면서 화가, 조각가, 시인들이 신봉하는 이 진리를 오직 무용가만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도입부의 전신 누드 행렬과 지난 가을 ‘SIDANCE 98’에서 인상 깊었던 ‘블랑카 리 무용단(스페인)’의 ‘미노타우로스의 꿈’을 연상시키는 중반의 상반신 누드 춤은 외설적이긴 커녕 “무용가의 나체야말로 미학의 출발점이며 미래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덩칸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예술세계 1999, 4월)

NYU(티쉬스쿨)의 안은미, 벨기에 P.A.R.T.S 출신의 메테 잉바르첸, 그리고 한예종을 졸업한 김보라가 만들어낸 세 편의 독립적인 작품에서 <춤에게 바치는 춤들>에 대해 동일한 시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있다. 열악한 무용 환경 아래 고난의 행군을 감당하며 25주년을 버텨온 SIDance의 성취를 축하하고 한류(K-Culture)의 시대 세계 최고의 무용전문페스티벌을 목표로 정진해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