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돈화문나들이, 이제 ‘원서동’을 주목해야!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돈화문나들이, 이제 ‘원서동’을 주목해야!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10.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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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2016년 9월 1일, 서울돈화문국악당이 개관했다. 2018년 10월 2일, ‘돈화문나들이’가 시작되었는데, ‘국악로’가 어떤 곳인지를 실체를 알린 투어콘서트였다. 이 곳이 근현대국악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 알렸다. 햇수로 5년차를 넘는 ‘돈화문나들이’를 보면서, 그 내용과 범위를 확장해야 함이 절실해진다. 지금처럼 운니동, 익선동, 봉익동을 돌아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제 원서동을 중심으로 해서 계동으로 넓혀야 한다. 그곳에 국악인이 살았고, 국악과 관련된 비사(祕史)가 숨어 있다. 그곳은 어디일까?

한국영화 ‘유열의 음악앨범’(2019년, 정지우감독)을 보면, 남주(정해인)가 여주(김고은)이 탄 차를 쫒아가는 장면이 있다. 계동길에서 원서동길로 이어진다. 이 길이 그대로 국악로드이다. 우리 음악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길이다. 

원서동 인근에 국악인들이 많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26년(일제강점기, 대정 15년)이다. 이제 곧 백 년이 된다. 이왕직아악대가 봉상시(당주동) 건물을 사용했는데, 이왕직아악부로 명칭을 바꾸고 승격되면서 군위영(운니동) 건물로 이주를 한다. 이 때부터 이왕직아악부에서 모집하는 아악생도 수업 연한을 5년으로 늘리고, 3기생으로 모집한다. 당시 이왕작이악부는 운니동에 있었는데, 길 건너편인 원서동에 국악인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1926년, 원서동에 조선악인(朝鮮樂人)이 살기 시작하다!  

단소의 명인 인간문화재 봉해룡(奉海龍, 1911~1995)은 이왕직아악부 3기생이다. 익선동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를 거쳐서 아악생 양성소에 입소 (1926년)했다. 종로 토박이인 그는 원서동 76번지에 살았다. 원서동에서 단소가 들리는 한옥을 찾으면, 그 집에 봉해룡명인의 자택이었다. 이왕직아악부는 해방 후 구황궁아악부로 개칭으로 하고, 국립국악원(1951년)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관련된 대다수가 바로 원서동 인근에 살았다. 국립국악원은 휴일이면 이들 자손의 예식장이 되었다. 봉해룡의 아들도 여기서 예식을 올렸다. 

원서동 76의 45번지. 판소리명창 박동진(朴東鎭, 1916-2003)이 국립국악원과 인연을 맺으면서 사셨던 곳이다. 해방 후 박동진은 창극과 여성국극의 편곡자이자 무대감독으로 활동을 하다가, 1961년부터 국립국악원 즉 원서동과 인연을 맺었다. 1968년 9월 20일 정오, 당시 국립국악원(운니동 98번지)에서 5시간 걸리는 흥보가의 계창(繼唱)이 화제가 되었는데, 이제 오늘날 완창 판소리의 시작이다. 

대금정악의 인간문화재 김성진(金星振, 1916~1996)은 바로 박동진 명창과 이웃에 살았다. 종로구 묘동 출신으로, 원서동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1984년 5월, 그의 댁을 방문하고 나온 후, 소설가 유익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집을 나와 원서동 비탈길을 내려오는 동안, 일생 동안 군자의 즐거움 이상의 파격을 탐한 일이 없는 대금정악의 노대가 김성진옹의 인품과 생애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아 철썩이고 있었다.” 그 원서동 비탈길은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등굣길이었다. 
그런데 봉해룡명인댁에선 단소소리가 들렸지만, 김성진명인댁에선 대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성진 명인은 애주가로도 유명해서 ‘딸기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어느 날 그가 대취(大醉)하여서, 애지중지하던 대금을 잃어버렸다. 그 이후는 김성진명인은 꼭 국립국악원 (운니동 98번지)에 악기를 두었다. 외부의 공연을 제외하고, 대금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국악인들이 살던 한옥, 공간사랑이 되다   

원서동과 관련해서 특히 기억해야 할 공간이 원서동 222의 2번지. 1970년 1월 31일, 판소리보존연구회 창립총회가 인간문화재 박록주(朴綠珠, 1906~1979)여사의 자택에서 열렸다. 이사장 유기룡, 부이사장 강한영, 상임이사 이보형이었으며, 김연수 박록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정광수가 이사, 박동진 장영찬 감사였다. 판소리의 중흥을 위해서 명창과 학자가 모였고, 고문 김연수, 이혜구, 박헌봉, 성경린, 한갑수였다. 지금의 공간사랑 인근이다. 당시 거기에는 작은 한옥이 즐비했는데, 박록주여사가 판소리를 가르치는 소리에 인근주민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록주여사는 언제나 문을 모두 꼭 닫고, 여름임에도 다락의 솜이불을 꺼내서 그 안에서 스승과 제자가 소리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찍이 원서동에 거주한 명창부부로 강장원(姜章沅, 1909 ~ 1962)과 임유앵명창(林柳鶯, 1913-1964)이 있다. 1957년 한 신문에서 ‘같은 길을 가는 부부’를 특집으로 다루었는데, 거기에 이들 부부가 등장한다. “강씨 부부는 창덕궁 근처 원서동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십여칸이나 될즉한 아담한 자택에서 4남 3녀를 거느리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1957. 4. 5. 동아일보) 

강장원의 차남이 강문득((姜文得, 1945~2003)으로 원서동 출생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는데, 부부는 강문득을 가야금을 가르쳤다. 당시 가야금명인 김병호(1910~1968)는 인천에 거주했는데, 강장원부부가 원서동에 거처를 마련해주어서, 김병호는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김병호류 가야금산조’가 서울에서 알려진 곳도 원서동이다. 

1977년 4월 22일, 원서동에 ‘공간사랑’이 개관했다. ‘공간’ 사옥이 생김으로 해서, 박록주명창을 비롯해서 국악인들이 거주하던 한옥은 아쉽게도 사려졌지만, 이 극장을 통해서 국악의 맥은 이어졌다. ‘공간 전통예술의 밤’을 통해서 사물놀이, 공옥진, 김금화, 김석출 등이 제대로 예술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1993년 2월 6일 (정월대보름), 북촌창우극장이 개관했다. 북촌창우극장은 개관 때부터 신진국악인들에게 열린 공간이었고, ‘천차만별콘서트’(신진국악실험무대)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돈화문나들이’는 과거의 성공을 발판삼아서 새롭게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는데, ‘원서국악로드’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