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대구 오페라와 페라라 극장 협업한 <돈조반니>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대구 오페라와 페라라 극장 협업한 <돈조반니>
  •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1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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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재미와 멋진 음악 어우러진 흥겨운 무대

올해 19회를 맞는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은 전국의 오페라 팬들이 찾는 우리나라의 대표 음악제로 자리잡았다. 아쉽게도 개막작 <투란돗>을 놓쳤다. 엔데믹으로 접어들면서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시간을 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돈조반니>는 만사 제쳐놓고 보아야 했다. 낭만 소설가 호프만이 ‘오페라 중의 오페라’로 찬양한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 인간성의 파노라마이자 음악의 대향연 <돈조반니>…. 이 작품은 모든 출연자들이 훌륭한 기량을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자주 무대에 올리기 어렵다. 이 드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페라라 시립오페라단이 공연한다니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10월 8일 오후 2시반, 공연 30분전, 대구오페라하우스 로비에서는 화사한 현의 앙상블이 펼쳐졌다. 디오(Daegu Int’l Opera) 오케스트라의 현악 파트 수석들이 <돈조반니> 삽입곡들 – 2막 만찬 장면에서 연주되는 마르틴 이 솔레르Martin y Soler와 사르티Sarti의 작품, 그리고 모차르트 피가로의 아리라 ‘나비야, 더 이상 날지 못하리’ - 을 연주해 주었다. 전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위한 최상의 음악 서비스였다. 로비에서는 페라라 오페라 단원 몇 명이 광대 분장을 한 채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걸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을 주며 관객과 출연자 사이의 벽을 허문 유쾌한 시도였다. 

무대에서는 공연이 시작되는 3시까지 ‘벨에포크’ 양식의 이탈리아 서커스를 맛뵈기로 선보여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 날 연출은 출연자들이 객석을 누비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돈조반니와 레포렐로가 객석 통로에서 대사를 주고받고, 돈조반니가 여성 관객을 일으켜 세운 뒤 ‘세레나데’를 불러 주고, 돈조반니를 추적하는 선남선녀들이 객석을 샅샅이 뒤지는 등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줄여서 관객들에게 생생한 즐거움을 주었다. 광대로 분장한 레포렐로가 ‘튜닝’, ‘지휘자’, ‘휴식’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걸어다닌 것도 웃음을 자아냈다. 서곡이 연주될 때는 안젤라 프란카빌라가 줄타기 묘기를 선보였는데, 음악에 맞춘 줄타기 동작에 관객들은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지나치게 서커스로 흘러서 음악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닌지 우려됐으나,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대는 포장마차 두 대와 계단식 의자 두 세트를 놓아서 단촐하고 경쾌했다. 서커스 방식의 연출과 잘 어울린 무대였다. 출연 성악가들의 미덕은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었다. 이탈리아말로 된 오페라를 이탈리아 성악가들의 노래로 듣는 것은 편안했다. 돈조반니를 맡은 조반니 루카 파일러는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1막, 레포렐로(줄리오 리코)의 ‘카탈로그의 노래’, 돈나 안나(율리아 메르쿠디노바)의 ‘나의 명예를 더럽힌 자에게 복수를’, 돈오타비오(로렌초 마르텔리)의 ‘그대의 평화를 위하여’, 체를리나(실비오 칼리오)의 ‘마제토, 저를 때려 주세요’는 많은 박수를 받았다. 1막 초반은 다소 어수선했다. 돈나 엘비라(마르타 라자로)는 소리가 뻑뻑하여 조금씩 늦게 나온다는 느낌을 주었고, 돈오타비오는 성량이 부족하고 음질의 기복이 심했다. 하지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음악은 안정을 찾았다. 특히 체를리나의 아리아는 오케스트라의 명료한 첼로 소리와 부드러운 화음이 어우러져 달콤한 느낌을 잘 살렸다. 2막, 돈오타비오의 ‘사랑하는 안나를 위하여’와 돈나 엘비라의 숭고한 아리아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은 오케스트라의 목관이 노래와 어우러지며 아름답게 빛났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이날 음악의 압권은 2막 피날레, 기사장의 심판 장면이었다. D단조의 무시무시한 화음과 금관의 포효에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기사장을 맡은 베이스 알레산드로 아고스티나키오는 3층 박스석에서 노래하여 무대위의 돈조반니, 레포렐로와 입체적인 앙상블을 이루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 파트 인원이 부족하여 밸런스가 안 맞는 대목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열성을 다해 연주하여 만족스런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 대목의 연출은 아주 독특했다. 돈조반니가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대신 아크로바틱을 맡은 여성을 안고 침대로 갔다. 돈조반니의 삶 자체가 이미 지옥이었다는 연출가의 해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청중들을 충분히 설득하는데 성공했는지 다소 의문이다. 1787년 프라하 초연 때 기사장의 심판 장면 뒤에 있던 선남선녀들의 에필로그는 생략했다. 돈조반니의 파멸로 끝나는 일종의 비극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1788년 빈 공연 때 삽입한 2막의 한 대목 - 체를리나가 레포렐로를 혼내 주는 장면 - 은 넣지 않았다. 레포렐로가 돈조반니의 악행을 도운 것이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레포렐로 자신의 책임은 없는가,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빈 공연의 뉘앙스를 살렸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옥의 티’라 할 만한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돈나 엘비라는 돈조반니의 영혼을 걱정하는 숭고한 인물인데 의상이 너무 저렴해서 무척 거슬렸다. 기품 있는 의상으로 하는 게 나았겠다. 돈나 엘비라와 돈오타비오의 2막 아리아는 매우 진지한 장면인데, 두 사람이 장난스런 액션을 주고 받도록 연출해서 산만했고 음악에 몰입을 방해했다. 1막 시골 결혼식 장면에서 코러스 1명 – 깍두기 머리의 남성 - 이 특정 대선 후보를 연상케 하는 어퍼컷 동작을 취한 것은 부적절했다. 불쾌감을 느낀 청중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대구국제오페라축제-페라라 극장 오페라 ‘돈조반니’

3시간에 걸친 공연은 전체적으로 즐거웠다. 페라라 시립오페라극장과 함께 한 이날 공연은 ‘연대와 다양성’이라는 축제의 취지를 잘 살린 훌륭한 무대였다.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독일 만하임 오페라가 선사할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10월 16, 17, 19, 23일)은 이번 축제의 핵심 이벤트가 될 것이다. 10월 28~29일 국립오페라의 베르디 <라트라비아타>와 11월 4~5일 영남오페라단의 로시니 <신데렐라>도 기대되는 무대다. 대구오페라극장이 제작하여 11월 18~19일 공연할 윤이상의 <심청>은 이번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무르익는 이 가을, 대구오페라페스티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