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모차르트 미사, 생명을 예찬한 놀라운 예술적 경험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모차르트 미사, 생명을 예찬한 놀라운 예술적 경험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2.10.2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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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기도’, 제14회 서울국제음악제 개막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가 이 가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지난  22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제14회 서울국제음악제가 막이 올랐다. 이번 음악제의 모토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다. 전쟁과 갈등, 빈부격차와 환경위기로 위태로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보자는 취지였다.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는 이 취지에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모차르트는 결혼 전, 사랑하는 콘스탄체가 앓아눕자 그녀가 쾌유하면 미사곡을 하나 쓰겠다고 약속했다. 작곡엔 시간이 걸렸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결혼했고, 첫 아이 라이문트 레오폴트가 태어났다. 이 미사곡은 두 사람의 결혼을 기념하고 첫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도 갖게 됐다.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 커튼콜 장면.

모차르트는 1783년 여름, 잘츠부르크로 이 작품을 가져가서 9월 말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다.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했고, 콘스탄체가 소프라노를 맡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누나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 숭고한 작품을 통해 갈등과 오해를 풀고 가족의 화합을 이루기를 원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봉건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성 페터 성당에서 초연했다. “미사곡은 30분을 넘으면 안 된다”는 대주교의 규범을 뛰어넘은 대작이었다. 무엇보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소중히 여긴 사랑과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겹겹이 담고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로 귀에 익은 숭고한 입당송(Kyrie)이 홀에 울리자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소프라노 서예리,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테너 국윤종,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 등 솔로이스트는 물론, SIMF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때로 힘차고 때로 섬세한 앙상블로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소프라노 서예리는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어려운 솔로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날 연주의 압권은 역시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였다. 서예리의 맑고 섬세한 목소리는 오보에, 플루트, 바순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들려주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신비롭고, 모차르트의 첫 아이가 세상에 온 것도 경이롭고, 우리 평범한 사람들 한명한명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도 모두 기적이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생명체다. 서예리가 부른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는 ‘우리를 위한 기도’를 생명의 예찬으로 승화시킨 놀라운 예술적 경험이었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이라 할 만한 ‘그대를 찬양함’(Laudamus Te)을 멋지게 불러서 천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다. 서예리와 김정미가 함께 한 ‘도미네 데우스’(Domine Deus)는 서로 다른 음역과 음색이 어우러진 멋진 조화와 균형미를 선보였다. 이 두 사람을 독창자로 선정한 기획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여성 파트에 비해 비중이 다소 낮았지만, 테너 국윤종과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도 인상적인 소리를 들려주었다. 홍석원이 지휘한 SIMF 오케스트라는 질감과 다이내믹이 뛰어났다. 푸가가 등장하는 상투스(Sanctus)와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SIMF 합창단은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다만 ‘그라티아스’(Gratias) 부분의 합창은 좀더 표정을 살려서 깊이 있는 느낌을 강조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곡 중간에 박수를 칠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였지만, 여러 대목에서 박수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할 만큼 감동적인 연주였다.

토마스 바우어는 마지막 베네딕투스에만 등장해서 아쉬움을 남겼지만, 10월 26일(수) 독창회에서 슈만과 말러의 연가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소프라노 서예리는 10월 28일(금)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부를 예정이다. 이 두 사람은 이번 음악제에서 또 만날 기회가 있는 셈이다.

2부를 장식한 대미사에 앞서 1부는 세계적인 호른 연주자 라덱 바보르작(Radek Baborák, 베를린필 수석을 지낸 그는 체코 사람이므로 ‘드보르작’Dvorák처럼 ‘바보르작’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팸플렛과 자막에서 ‘바보락’이라 한 것은 오류로 보인다)의 무대였다. 그는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4번 E♭장조를 연주했는데, 탁월한 기량과 소탈한 매너로 청중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 커튼콜 장면.

모차르트는 고향 친구인 요젭 로이트겝을 위해 4곡의 호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악보에 ‘바보 로이트겝’, ‘잠깐 쉬어’, ‘아이고, 이제 끝이군’, ‘당나귀, 황소, 바보 로이트겝을 긍휼히 여기며’ 등의 농담을 써 넣었고, 특히 4번 악보는 빨강, 파랑, 검정, 녹색 잉크로 그려서 미술작품처럼 만들어 놓았다. 모차르트는 이 곡들을 가리켜 ‘로이트겝스러운 것’Das Leutgebische이라 했다. 단순 소박하고 유쾌한 느낌이 바로 ‘로이트겝스러운 것’ 아닐까? 이날 바보르작의 연주와 무대 매너는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 혼자 화음을 연주한 대목은 청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청중들의 환호에 답하여 앵콜곡으로 연주한 도니제티의 호른 협주곡 F장조도 아주 값진 선물이었다. 바보르작도 27일(목), 28일(금) 음악제의 앙상블에 참여할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다.

모차르트 대미사 C단조를 실제 연주로 듣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완성도 높은 연주를 한 번만 하고 흘려보내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이 음악가들이 전국의 주요 성당을 순회하며 이 작품을 더 많은 분들에게 들려드리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를 위한 기도’ 첫 무대가 끝날 무렵, 어둠이 드리웠다. 서울 시내는 부쩍 늘어난 촛불 인파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통과 상처가 많은 이 시대, 서울국제음악제가 건넨 위로가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