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만하임 국립오페라의 '신들의 황혼',관객 압도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만하임 국립오페라의 '신들의 황혼',관객 압도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2.10.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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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오페라페스티벌, ‘반지 사이클’로 절정 이뤄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칼럼니스트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독일의 음악가들이 들려주는 바그너는 역시 달랐다. 죽죽 뻗어가는 금관은 비단결 같은 현악과 앙상블을 이뤘고, 뛰어난 기량의 성악가들은 오케스트라와 혼연일체가 되어 바그너의 진수를 맛보게 해 주었다. 제19회 대구 국제오페라페스티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만하임 국립오페라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막 공연이었다. 이 가운데 23일(일) 오후 3시부터 8시 10분까지 5시간 넘게 이어진 <신들의 황혼>은 이번 축제의 정점이었다.  

네 편을 모두 감상하려고 서울과 대구를 네 차례 오가는 것은 무리였다. 4부작 중 하나만 고르라면 아무래도 마지막 편인 <신들의 황혼>이었다. ‘반지 시리즈’ 네 편의 스토리가 집약돼 있고, 모든 유도동기가 등장하며, 특히 ‘지그프리트의 장송곡’과 ‘구원의 피날레’를 놓칠 수 없었다. 역시나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은 압권이었다. 모든 관악기들이 불을 뿜었고, 영웅의 모티브와 노퉁의 모티브가 이어지는 대목은 전율이었다. 브륀힐데가 지그프리트와 함께 불에 타고 라인의 세 요정이 절대 반지를 돌려받은 뒤 펼쳐진 ‘구원의 피날레’는 벅찬 감동이었다. 

알렉산더 소디 지휘 만하임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기대한 만큼 충실한 사운드와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성악가들도 훌륭했다. 소프라노 다라 홉스는 힘차고 충만한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 깨끗한 음색으로 최상의 브륀힐데를 들려주었다. 지그프리트를 맡은 요나단 스타우튼은 강력한 헬덴 테너라기보나는 미성의 리릭 테너에 가까웠지만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하겐 역의 베이스 전승현은 충실한 목소리와 표현력으로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그밖에 군터 역의 바리톤 토마스 베라우, 구트루네 역의 소프라노 빅토리아 카민스카이테 등 주요 출연자들은 흠잡을 데 없는 기량으로 바그너의 드라마를 전달했다.  

연출을 맡은 요나킴은 2017년 독일 오페른벨트가 선정한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된 분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프로젝트 화면과 라이브 카메라를 활용하여 오페라의 느낌과 뉘앙스를 풍요롭게 해 주었다. 2막 알베리히가 객석 통로에서 등장할 때 카메라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오며 보여준 입체적인 영상은 관객의 집중도를 높여 주었다. 마지막 발할라가 불타는 장면에서 브륀힐데가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죽어가는 장면도 기발한 연출이었다. 1막에서 바그너의 저작 <음악과 혁명>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서 표지를 배경에 투사했는데, ‘반지 4부작’이 19세기 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참신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식 연출이 음악 자체를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됐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오페라 연출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게 대세고 음악의 현대적 해석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지만, 자칫 음악과 영상이 따로 놀며 관심을 분산시킬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지그프리트 장송곡’과 ‘구원의 피날레’에서 커튼을 내리고 영상을 프로젝트한 것은 관객들이 음악을 느낄 심리적 공간을 차단해서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자막은 뜻이 애매하고 어법에 안 맞는 대목이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했다. 아무래도 독일어 원어의 느낌을 살리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바이로이트에 가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반지 사이클’ 전막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올해 대구오페라페스티벌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2005년 게르기에프 지휘의 마린스키 오페라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막을 공연한 바 있는데, 그 때에 비해 음악이 더 훌륭했다. 극장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라 오케스트라와 성악의 사운드를 오붓하게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관객은 만석이었고, 서울에서 온 동료 음악 칼럼니스트들을 여러 명 마주쳤다. 대구오페라페스티벌이 확실히 전국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음악평론가 유정우씨의 사전 강연도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반지 4부작’을 ‘사랑’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라인의 황금>은 사랑과 권력, <발퀴레>는 사랑과 계율, <지그프리트>는 사랑과 자유, <신들의 황혼>은 사랑과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완성에 도합 30년이 걸린 대작으로, 대본은 <신들의 황혼>, <지그프리트>, <발퀴레>, <라인의 황금> 순서로 썼지만 작곡은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의 순서로 했다고 한다. 마지막 <신들의 황혼>이 ‘반지 4부작’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것이다. 이 대작을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설득력 있는 해설이었다.     

아침 8시반에 집을 나섰는데 공연을 보고 집에 오니 자정이었다. 온전히 바그너에게 바친 하루였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대구오페라페스티벌이 반환점을 지나 종반으로 가고 있다. 10월 28일(금)과 29일(토) 영남오페라단의 <라트라비아타>, 11월 4일(금)과 5일(토) <신데렐라>, 11월 12일(토) 콘체르탄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자니 스키니>, 11월 18일(금)과 19일(토) 윤이상 <심청>이 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