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두 달의 대장정 마무리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두 달의 대장정 마무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2.10.3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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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 높은 음악과 스토리, ‘K-뮤지컬’ 가능성 보여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가 10월 30일 두 달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이 작품은 9월 3일 초연 이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으로 화제가 됐고, 뮤지컬 매니아들이 사랑하는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높은 완성도로 젊은 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창작 뮤지컬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성과를 이뤘다.

‘멜로디의 천재’ 차이콥스키의 모티브를 활용한 음악은 이 뮤지컬을 돋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피아노협주곡 1번, <호두까지 인형>,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등의 친숙한 선율이 뮤지컬 넘버로 변형되며 자연스레 드라마에 녹아드는 장면들이 즐거웠다. 차이콥스키 음악을 잘 이해하는 작곡자 이진욱과 작사자 오세혁의 긴밀한 협업이 이 뮤지컬의 첫 번째 성공 요인이었다.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발레 <호두까기인형>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차이콥스키의 대표작을 극중극 형식으로 삽입하여 재미을 더한 것도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특히 차이콥스키가 환상 속에서 알료샤를 만나고, 결투 끝에 그를 죽이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의 결투 장면을 차이콥스키의 고뇌와 오버랩시킨 훌륭한 연출이었다. 

스토리는 흡인력이 있고 감동적이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였음을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드라마의 전제로 삼았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무척 과감한 발상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차이콥스키는 제자 알료샤와 함께 음악을 나누며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불행이 엄습한다. 러시아 사회는 맹목적 애국주의에 휘말리고, 사랑하는 알료샤도 전쟁터로 떠나 목숨을 잃는다, 실의에 빠진 차이콥스키는 마음 속 음악의 샘이 메말라서 <예프게니 오네긴>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하는 주인공 오네긴은 차이콥스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학잡지 편집장 안나 이바노브나는 절망한 차이콥스키를 위로하며 <예프게니 오네긴>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공연 장면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공연 장면

알료샤와 안나는 가공의 인물이다. 차이콥스키는 제자와 사랑을 나눈 적이 몇 번 있지만 알료샤는 가공의 인물이다.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고 격려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안나 이바노브나라는 작가와 교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 5인조’의 한 명인 세자르 큐이가 차이콥스키 음악을 ‘너무 서구적’이라고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애증을 나눈 친구는 아니었다. 전쟁이 차이콥스키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정도 픽션이다. 차이콥스키 생애에 러시아가 치른 전쟁은 1853년~1856년의 크림 전쟁과 1877~1878년의 러시아-튀르키에 전쟁, 이렇게 두 차례인데 차이콥스키가 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사실로 오인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픽션으로서 개연성은 충분하니 그 자체로 즐기는 게 좋을 것이다. 

10월 30일 ‘막공’은 티켓을 구할 수 없어서 27일(목) 공연을 관람했다. 차이콥스키 역의 에녹과 알료샤 역의 김지온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뛰어난 표현력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두 사람의 이중창은 이 뮤지컬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었다. 세자르 큐이를 맡은 테이는 흡인력 높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러시아에 대한 사랑과 차이콥스키와의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와 발레가 등장하는 극중극 장면은 조연급 배우들의 열연이 두드러졌다. 장면마다 의상과 분장을 바꾸고 등장하여 뮤지컬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안나 역의 김소향은 가창력은 수준급이었지만 연기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차이콥스키가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다”고 밝힐 때 그녀는 충분히 그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스토커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예프게니 오네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차이콥스키에게 설득할 때 안나의 아름다운 대사 - “마른 잎 같은 사람,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날레를 작곡해 달라”는 호소 - 를 충분히 살리지 못해서 감동을 주지 못했다.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공연 장면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공연 장면

9인조 오케스트라를 무대 뒤에 배치한 것은 좋은 시도였다. 이왕이면 뮤지컬 중간중간에 오케스트라가 보이도록 연출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연주는 대체로 무난했지만, 차이콥스키 <사계> 중 ‘10월’을 솔로 바이올린이 연주할 때 좀 더 맛깔스런 표정을 들려주면 더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음악을 너무 갑자기 마무리해서 여운을 느낄 수 없게 만든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공연에서는 좀 더 섬세한 연주를 기대한다. 마이크를 사용한 음향은 감상에 불편이 없었지만 오디오 레블이 다소 높았다. 요란한 사이키 음향에 익숙한 사람들은 좋아했겠지만, 자연음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큰 소리로 노래하는 대목이 시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날 공연에서는 젊은 뮤지컬 팬들의 관람 문화를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차이콥스키와 안나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 <그대여, 떠나라>가 끝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고, 다시 앉아서 출연자들의 엥콜 합창을 들은 뒤 두말없이 퇴장했다. 출연 가수들에 대한 배려가 담긴 행동이겠지만, 일사불란한 태도는 좀 차갑게 느껴졌다. 관람 문화를 바꿀 정도로 뮤지컬이 젊은 층에 확산됐다면, K-뮤지컬이 세계로 나갈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추를 아름답게 장식해 준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