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홍선웅 작가 “작가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존재 가치를 찾는다”
[Special interview] 홍선웅 작가 “작가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존재 가치를 찾는다”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 승인 2022.11.0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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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관통하는 키워드, ‘민족’, ‘분단’, ‘평화’
5‧18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민중미술 방향 결심 굳혀
근대기 판화, 우리 민족정신 느낄 수 있어
강화 이주, 바빴던 조직 생활 이후 작품 활동 다시 시작
11.25~27, 파리 아트북 페어 《쌀롱 빠즈》에 '슘 갤러리'로 참가 ‘한국 작가 4인 참여’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한‧프 현대 목판화 전시 《Affinités-결의 만남》에서 만났던 홍선웅 작가는 선한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손에서 조정래 작가 장편 소설 『태백산맥』 표지 그림이 완성되고, 민족의 상흔이 어른어른하게 보이는 듯한 <시암리 초소>, <제주 4‧3 진혼가>가 완성됐다는 것이 놀라웠다. 선한 인상과 굵직하고 단단한 민족의 정서, 강한 목소리를 냈던 민주주의 활동 역사 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에서의 만남을 연으로 이어진 이번 인터뷰에서 그가 가진 따뜻하면서 강하고 굵직한 목소리를 만나면서 그와 그의 작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선웅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선웅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지난 달, 날이 좋으면 북한 땅이 보이기도 한다는 김포 끝자락 보구곶 근방에 있는 홍선웅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홍 작가는 우리나라 민중미술계의 산증인이자 거목으로 언급된다. 민미협 창립부터, 이후 민예총 활동도 오랜 시간 함께했다. 그의 작업실에서 2시간 여 진행된 인터뷰는 마치 7,80년대 민중미술계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을 들게 했고, 또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시대의 상흔과 민중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게 했다.

홍 작가는 90년대 초 김포로 이주해, 중심부의 조직 활동을 뒤로 하고 다시금 작품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세 갈래의 시기로 구분된다. 80~90년대 중반까지의 ‘민중 판화’, 90년대 이후 불교를 소재로 한 ‘진경 판화’, 2007년경까지 작업한 차(茶)와 매화를 소재로 한 판화 등이다. 최근에는 인천, 부산, 제주 등을 소재로 한 <인천 10경>, <대평 포구> 등의 풍경 판화도 선보이고 있다.

▲홍선웅, 인천10경- 소래포구, 다색목판화, 68X 54cm, 2010
▲홍선웅, 인천10경- 소래포구, 다색목판화, 68X 54cm, 2010 (사진=홍선웅 제공)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순간 속에서 홍 작가는 항상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세상을 직시하는 작가였다. 조직 활동에서 멀어졌음에도, 그는 항상 작가의 표현을 원하는 곳에 나아가 시대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분단 문제와 역사적 상흔을 항상 마주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홍 작가는 그 누구보다 ‘판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직접 발품을 팔고, 투자해서 수집한 한국 근대시기 판화의 자료는 특별한 의지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결과였다.

‘판화’는 미술계에서도 쉽지 않은 장르로 손꼽히곤 한다. 그럼에도 홍 작가는 꾸준하게 목판화라는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왔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인터뷰 전에는 그 힘이 어떤 명확한 언어,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힘과 정신은 굉장히 오랜 시간 그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태도였다. ‘작가는 언제나 시대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말 안에 담긴 수많은 시간과 의미들을 느낄 수 있는 인터뷰였다.

▲파리 아트북 페어 《쌀롱 빠즈》 출품작, (좌측) 홍선웅, 분단과 평화, 47×37.5cm,아트북,2022/ (우측) 홍선웅, 임하도의 봄, 45×38cm, 아트북, 2022
▲파리 아트북 페어 《쌀롱 빠즈》 출품작, (좌측) 홍선웅, 분단과 평화, 47×37.5cm,아트북,2022/ (우측) 홍선웅, 임하도의 봄, 45×38cm, 아트북, 2022 (사진=홍선웅 제공)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 아트북 페어 《쌀롱 빠즈(Salon PAGES)》에 참가한다. 어떤 작품을 선보이는가.

올해 김포문화재단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현대 목판화 전시 《Affinités-결의 만남》을 함께 준비하고 전시 총감독을 맡았던 프랑스 베르사유미술대학 김명남 교수와 같이 참가하게 됐다. 《쌀롱 빠즈(Salon PAGES)》는 올해 26회를 맞는 아트 북 페어로 Palais de la Femme에서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다. 파리에 있는 슘 갤러리(GALERIE SCHUMM-BRAUNSTEIN/위치:9 rue de Montmorency, 75003 PARIS, FRANCE)로 참가한다. 한국 작가는 홍선웅, 김명남, 김상구, 김억 총 4명이 참여한다.

이번에 내가 선보이는 작품은 <분단과 평화>, <임하도의 봄> 아트 북이다. 모두 직접 제작한 도서로, <분단과 평화> 같은 경우는 한국의 분단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면서 제작을 시작했다. 현재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여전히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한반도에 얼룩져 있는 역사를 마주하게 됐고, 프랑스에도 지금 이 상황이라면 한반도의 현실을 좀 더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출품을 결정했다.

▲홍선웅 작가가 파리에 출품하는 아트북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홍선웅 작가가 파리 아트북페어에 출품하는 <분단과 평화>를 소개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서양미술을 전공했지만, 민중미술 작가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에는 설치 미술 작품 활동도 했지만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본인의 길이 좀 더 확고해졌다고 했는데, 당시 어떤 마음의 변화들이 있었는가.

대학을 막 졸업했을 당시, 1980년 초까지 나 또한 모더니즘 적인 작품을 많이 했다. 현상학, 분석철학 구조주의 등을 공부했고, 박서보, 이우환 선생의 작품 경향에 대한 연구도 끊임없이 했다. 그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런 모더니즘적 흐름이 있었다. 나도 1981년 《겨울‧대성리31인전》에서는 모더니즘 쪽 계열을 작품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내 마음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향해있었다.

1980년 다무그룹을 창립하고 활동을 지속해 나가면서 <사람들>, <상황과 인식> 같은 작품을 통해 시대 안에서 예술가가 가져야 하는 인식에 대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동학혁명 내용을 담은 작품 <사람들 1,2>이나, 신동엽 시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서서히 설치 작업에서 평면 작업으로 변화해왔다. 그 과도기에 있었던 작업들이 <국풍 시리즈>였다. 당시 군부에서 기획한 축제 《국풍 81》에 야유를 보내는 작업이었다. 자연석을 자르고 실크스크린으로 돌 위에 탱크나 군인들의 모습을 담아서 강가에 배치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민중미술을 시작하게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면서 항상 고민했던 지점이 있었다. 과연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미술에 있어서 표현 방법을 어떤 식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동료들과 굿 문화, 불교 탱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서양의 것이라든지,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는 시기에 과연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들의 연장선상이었다. ‘현실과 발언’에 오윤, ‘두렁’에 김봉준, ‘일과 놀이’의 홍성담과 함께하고 서로 배우며, 생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검정 잉크, 칼의 맛에서 오는 어떠한 힘, 시각적으로 강한 에너지가 하나의 방식이라고 느꼈다.

 

민미협 활동도 오래했고, 미림여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해임도 당했다. 수많은 현장을 겪었고, 김포로 들어왔다. ‘문수산 판화공방’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만들고 차와 매화에 빠지며, 새로운 작업세계를 만들어왔다. 어떤 시간들을 거쳐 왔는가.

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조직 일로 정말 바쁜 삶을 살았다. 항상 군부독재 속에 있었고, 민주화 운동, 분단 문제, 전교조 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미림여고에서는 5년 정도 교직 생활을 했는데, 민중교육지에 「새롭게 꾸미는 미술시간-통합정서로서의 미술교육」이라는 글을 썼다가 해직 당했다. 그 때 같이 지냈던 미술 교사 모임 동료들이 박재동, 강요배 등이다. 당시에 미술 교사에서 잘렸는데, 주위에 있는 선배들이 “야, 너 차라리 잘됐다. 민미협 일 좀 도와라.”라면서 나를 민미협 창립 준비로 끌어들였다.

민미협은 1985년 창립됐고, 그 전까지 《해방 40년 역사전》이라는 전국 순회 전시를 다녔다. 생각하고 보면, 그게 전국 조직 작업과도 같았다. 전시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당시에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민미협이 창립되고 나서는 정말 바쁘게 돌아다녔다. 매일 데모도 하고, ‘그림마당 민’을 만들면서 전시도 끊임없이 했다. 정말 쉼없이 움직였고, 솔직히 조직 일에 치이던 때였다.

강화에 들어와서 작업실을 만들고 머물게 된 것은 30여 년이 됐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문영태 작가와 처음에 작업실을 물색하고 다녔다. 2년 정도 함께 사용하다가, 지금은 나 혼자 사용하고 있다. 이 작업실은 처음에 어린이 도서관의 용도였는데, 시설이 정말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무언가 끌리는 느낌이 있었다. 철조망이 가까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다보면 이 곳 만의 정서가 있었다. 어떨 때는 북한 방송도 들리곤 한다. 해군들이 자주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어떤 이들은 그런 상황이 무섭다고 하는 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분단이 주는 정서, 자연이 주는 정서가 있다.

처음 김포로 이주했을 때 동네 분들도 굉장히 반겨줬다. 서울에서 작가라는 사람이 왔다고 하니 신기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자주 반겨주고 틈틈이 먹을 것도 참 많이 갖다 줬다. 그리고 이 곳에선 자연의 흐름을 따라 1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늦가을 초겨울 즈음에는 기러기들이 왔다 갔다 하고, 청둥오리도 볼 수 있다. 봄이면 새싹이 돋는 기운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귀중함도 매일 마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에서는 정말 바빴고, 매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는데, 이 곳에 와서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여기 와서야 작품을 제대로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홍선웅,제주 4.3 진혼가,목판화, 182X60cm, 2018년
▲홍선웅,제주 4.3 진혼가,목판화, 182X60cm, 2018년 (사진=홍선웅 제공)

민중미술 활동에서 조금 물러나, 자연 속에 들어왔음에도 끊임없이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였다. <연평도 시리즈>, <시암리 초소>, <제주 4‧3 진혼가> 등 항상 시대의 사건과 마주하는 작품을 해왔다.

<시암리 초소>, <제주 4‧3 진혼가> 등이 나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본다. <제주 4‧3 진혼가>의 화면에는 당시 그 시대를 상징하는 많은 소재들이 담겨있다. 좌우이념의 대립, 당시 제주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자연물, 성벽 등 시대의 사건을 마주할 수 있는 소재들을 시공간을 넘어서 쌓아올리고자 했다. 화면 중앙하부에는 1947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제주도민들을 군인과 경찰이 좌파로 몰아 무고하게 살해한 모습을 담고, 제주항만의 군함과 포로수용소에 집결해 있는 경찰, 무장대와 전투를 위해 중산간 지역으로 가고 있는 군인들의 행렬, 무장대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는 비행기, 무장대의 전투장면, 중산간 지역에 피신했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제주 양민들, 처참하게 총살당한 제주 양민의 모습을 담았다.

<제주 4‧3 진혼가> 제작 당시 제주를 다니면서, 나는 ‘꼭두’에 특별한 감흥을 받았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좌우파의 이념적 갈등 속에서 4.3 사건을 통해 이렇게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비극적인 사건을 인물 꼭두인 어린 학생 목조각 인형을 통해 들여다보는 화면을 만들었다. 원래 꼭두는 망자의 넋을 달래고 추모하기 위해 무덤 속에 동행하게 하는 부장용으로 쓰인 기물이지만 이 판화에서는 사건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달하는 역사의 증인이 된다. 이렇게 소재를 차곡차곡 쌓아, 내 나름대로의 진혼가를 표현했다.

민중미술을 하겠다고 계속 고민할 때, 스스로 던진 질문들이 있었다. 당시의 주류였던 모더니즘 경향의 질문들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질문들이다. 자연, 인간, 세계, 평화에 대한 해석들, 어떻게 우리가 우주를 마주해야 하는지는 계속 묻게 된다. 그럼에도 왜 내가 민중미술을 하게 됐는지 더듬어보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나는 어떤 가치인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떠올렸기 때문인 것 같다.

광주 5‧18 민주항쟁을 마주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도 되는 것인가,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이것(모더니즘 경향)을 계속 해야 하는가, 물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그려야겠다고 길을 찾아나갔다. 민족이 가진 내용, 역사, 문화를 내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작품을 지속해야겠다고 스스로 방향성을 잡았던 것 같다.

시대가 변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작가가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연평토 포격 사건 때나, 백령도 천안함 사건 등 직접 그곳을 답사하고 작품으로 말했다. 그리고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하기도 했다. 계속 작품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은 우리 현실 그 자체라는 게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현실 자체의 표현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의 가치라고 본다. 현실에 대한 무반응 속에서는 어떤 존재적 가치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언제나 시대정신을 철학적 기조로 깔고 표현해야한다.

▲<제주 4.3 진혼가> 작품을 설명하는 홍선웅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근간에 고교생 작품 <윤석열차>로 비롯된 논란이 뜨거웠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영국 풍자만화가 스티브 브라이트 작품을 표절했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표절의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행태라고 본다. 청소년 친구여도 나름대로 느끼는 시대의 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느낌을 얼마든지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만평이 정말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이지만, 오히려 우리 나이 많은 작가들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걸 수도 있다. 그리고 선배 세대들도 그렇게 끊임없이 발화해왔다. 박재동 만평가도 굉장히 오랫동안 한겨레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을 얘기해왔다. 그 학생은 그런 만평가와 선대의 흐름을 이어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민족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작품으로 얘기한 힘 같은 것을 받았다고 본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근대 판화에 대한 자료도 많이 수집하고 연구도 진행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근대 판화는 암흑기다”라는 말이 맞지 않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근대기 판화는 어떠했는가.

근대시기를 보면 정말 많은 판화 자료들이 존재한다. 시기별로 신문이나 교과서 등에 판화 작업들이 계속 이어졌다. 예를 들어서, 1907년 저술된 초등학생용 국어교과서 『유년필독(幼年必讀)』에 모든 도판 목판화로 출간됐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자료로는 1906년 7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양기훈의 목판화 <민중청공 혈죽도>가 있다. 이 작품은 1905년 제2차한일협상조약 체결이후 자결한 민영환의 자결 이후, 그의 본가 영연실에서 자라난 푸른 대나무 네 그루에 대한 이야기인 겸곡생의 「혈죽기(血竹記)」와 함께 실렸다. 당시에는 사진 정판을 활용할 수 없어서, 수묵화를 직접 실지 못했고 그래서 연활자 활판에 목판화 각판을 붙여서 인쇄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조선지광(朝鮮之光)」 창간호 표지인 오일영의 <백두산>이 있다. 이 작품은 꼭 지금의 민중 판화 같다. 1922년 발행된 책의 표지로 사용됐는데, 그 당시는 우리 민족의 언어가 말살되고, 민족박해가 엄청 심할 때였다. 그 시절 오일영은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새겼을 까 하는 감동이 있다. <백두산> 작품을 보면, 굵은 선각에 의해서 아주 힘차게 융기하는 백두산의 활기찬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상징성과 이것을 그 시기에 표지로 담아낸 과정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근대 판화사를 ‘암흑기’라고 칭할 순 없다고 느낀다.

현재 우리가 조명하지 못하고 있는 근대 작가도 많다. 그 중에 오주환(吳周煥/1915.5.15.~1989.1.2.)이라는 작가가 있다. 오주환은 일전에 2019년 제 7회 원주 세계판화문화제 명주사고판화박물관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일제 식민지 시대의 판화>(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를 통해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신문과 잡지에는 공개되지 않은 작가다. 오주환은 남원 태생으로 호는 근원(槿園), 청호(靑湖)였다.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걷다가 이당 김은호에게 수묵채색화를 배우고 이후 후소회에서 활동한 화가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1930년대 말 경 조선판화미술사를 만들고 제작한 관광용 판화첩 <제1집 조선풍속>이다. 세로 11.9cm, 가로 9.1cm 크기에 모두 6점의 채색 목작가 수록됐다. 조선의 풍속을 목판화로 표현했고, 판화첩 뒷 표지에는 "Printed from hand card wood cuts, then hand painted(나무판자에 손으로 찍어서 손으로 칠한 것)"이라는 펜글씨도 남겨져있다. 그 당시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료다. 이외에도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정음사)의 표지를 장식한 이정 작가 전통‧민족미술 계열 오지호 작가 등, 계속 꾸준히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판화 역사가 있다.

▲홍선웅, 시암리 초소, 목판화, 76X134cm, 2018 (사진=홍선웅 제공)
▲홍선웅, 시암리 초소, 목판화, 76X134cm, 2018 (사진=홍선웅 제공)

‘작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민족의 문제, 시대정신 등을 많은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후배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런 정신들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이런 시대정신에 모두가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전 세대가 지켜왔던 그런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후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지향이 가장 크다.

상대적으로 잘 조명되지 않는 ‘한국 근대 판화사’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자료도 꾸준히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최근 2014년에 출간했던 「한국근대판화사」(홍선웅지음│미술문화)를 다시 개정 작업을 하고 있다. 새롭게 작성한 글도 있고, 빠진 작품들도 있어서 작업 중에 있다. 1960년대부터 2020년까지의 판화자료, 현대 판화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들은 지난해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다 기증을 했다. 1960년대부터의 역사는 후대 작가, 후대 이론가들이 연구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는 지금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내가 가진 ‘시대정신’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싶다. 지금도 김포문화재단과 함께 협력해 작업실에 김포 시민들을 초청해 판화 강의를 하기도 한다. 중‧고등학생, 시민들과 함께 옷 위에 실크 스크린 작업을 함께 해보고 어떤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미술은 살아있는 미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판화는 일반 시민들도 정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꾸준하게 시대와 시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회들을 만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