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중고제 국악명인들의 法古創新
[성기숙의 문화읽기]중고제 국악명인들의 法古創新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11.0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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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중고제 전통가무악의 재발견”을 화두로 서산, 홍성 등 이른바 내포지역에서 전승되는 춤·소리 문화를 본격 조명한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공연·학술·기록이라는 삼위일체로 접근하여 13권에 달하는 기록집을 출간했다. 중고제 전통가무악 관련 미공개 공연자료, 사진, 영상 등을 토대로 영상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가치를 확산시킨 것도 유의미한 성과라 여겨진다. 

주지하듯, 서산은 중고제 전통가무악의 본고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미 출신 고수관을 비롯 방만춘 그리고 중고제 국악명문 심정순 가(家) 예인들이 여럿 포진돼 있다. 심정순을 축으로 그의 후손인 심매향, 심재덕, 심화영, 심상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우선, 서산 해미 출신 고수관(高壽冠, 1794~1849)은 조선후기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는 그의 구수하고 은근한 창법이 당나라 시인 백거이에 비견된다며 그  재주를 극찬했다. 순조 26년(1826) 신위가 쓴 「관극시(觀劇詩)」, 그리고 1827년에 작성된 「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에도 고수관의 이름이 나온다.

한편,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1940)에도 그와 관련한 기록이 전한다. 고수관이 대구감사 부임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생점고를 불렀다는 것이다. 『조선창극사』에는 고수관 이름 옆에 ‘딴청 일수’라고 기록해 놓아 흥미를 더한다. 이는 ‘딴 목청’, 즉 ‘엇청’에 능통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고수관은 자신이 체득한 소리를 바탕으로 이른바 창작의 자율성을 즐기며 변용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한편, 서산 해미 출신 소리꾼 방만춘(方萬春, 1825~?) 또한 주목할 인물로 손색이 없다.  11세때 해미 인근 일락사(日落寺)에 들어가서 10여 년간 소리를 연마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22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명성을 얻었다. 판소리 명창을 기록해 놓은 「게우사」에도 방만춘의 이름이 나온다. 방만춘이 대단한 명창이었음을 웅변한다.

소리꾼 방만춘은 ‘미성’을 타고 났다고 알려진다. 판소리에서 미성에 치우치면 미학적으로 다소 결핍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를 고려한 방만춘은 일부러 투박한 아구성을 구사했다. ‘적벽가’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고전을 있는 그대로 부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윤색하고 개작하여 불렀다. 한마디로 변용의 귀재였던 것이다.  

방만춘의 예맥은 그의 손자 방진관(혹은 방응규)으로 이어졌다. 방진관이 취입한 고음반이 여럿 남아있다. 방진관은 홍성 출신 명고수·명무 한성준의 추천으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는 등 서울무대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전통예술계에서 한성준의 영향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알파시피, 서산 출신 심정순 가(家)는 중고제 전통가무악의 명문으로 통한다. 심정순(沈正淳, 1873~1937)을 축으로 근·현대 5대(代)에 걸쳐 일곱 명의 예인이 배출되었다. 부친 심팔록에게 국악을 배운 심정순은 소리를 비롯 피리와 통소에 능통했다. 『매일신보』의 「예단일백인(藝端一百人)」에는 심정순과 관련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한다. 충남 서산이 고향이고, 25세에 음악을 시작하여 조선 팔도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고제 국악명인 심정순은 중앙무대에서 가야금, 가야금병창, 판소리 명창으로 일가를 이뤘다. 전통 기법을 고수하는 한편, 판소리 개작운동에도 앞장섰다. 1910년 장안사 소속으로 ‘심정순일행’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는 심정순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밖에도 음반취입, 방송출연, 신문연재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12년 『매일신보』에 판소리 사설을 연재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문학인 이해조가 산정(刪定)한 심정순 판소리 사설은 「강상련(심청전)」, 「연의각(흥부전)」, 「토의간(수궁가)」 등이었다. 이는 ‘듣는 판소리’에서 ‘읽는 판소리’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심정순의 판소리 사설은 사실상 전승이 맥이 끊겼다고 보는 중고제 심정순 가(家) 소리문화의 가치를 일깨우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매일신보 연재 심정순 판소리 창본』, 연낙재, 2019 참조).

심정순의 예맥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장녀 심매향(沈梅香, 1907~1929)은 조선권번 소속의 이름난 예기(藝妓)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심매향은 악가무를 섭렵하고 공연과 음반취입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명성을 얻었다. 안타깝게도 20대 초반에 요절했다. 사망 소식이 조선일보에 기사화될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심정순의 장남 심재덕(沈載德, 1899~1967)은 국민가수 심수봉의 부친이다. 다소 뒤늦게 국악의 길로 들어선 그는 부친 심정순에게 기예를 익히고 명무 한성준 그리고 여동생 심화영과 청진권번, 진남포권번 등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중반 낙향하여 서산에 낙원식당을 운영하며 소위 ‘서산율방시대’를 주도했다. 이동백을 비롯 한성준, 김창룡, 이화중선 등 당대 기라성같은 명인명창들이 서산을 찾았다고 전한다.

심재덕은 한때 이화학당에서 국악이론을 가르쳤을 정도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보기 드문 예인이었다. 심정순의 막내딸 심화영(沈嬅英, 1913~2009)은 오빠 심재덕에게 중고제 단가, 가야금 등을 배웠다. 그의 승무는 단아하고 정갈한 미감의 고제 형식으로 이채롭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바로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이다. 그는 부친 심창래가 작고하자 숙부 심정순 밑에서 성장한다. 숙부 심정순에게 국악 전반을 사사하고, 서울무대로 진출하여 국악계의 주요 인물로 우뚝 섰다. 특히, 딸 심태진과 더불어 1948년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도미(渡美)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심상건, 심태진은 해방이후 해외에 진출한 최초의 국악인으로 기록된다.

심상건은 신무용가 조택원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로 특별한 존재다. 1949년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된 조택원의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는 심상건의 토속적인 장고가락에 토대하여 안무된 신무용 명작이다. 가야금의 명인 고(故) 황병기는 심상건에 대해 ‘해학과 파격의 산조 스승’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심상건은 즉흥연주의 달인으로 통한다.

여기서 보듯, 고수관·방만춘·심정순·삼상건 등 중고제 전통예인 대부분은 창조성이 뛰어난 예인들이었다. 도제식의 구전심수로 체득한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성을 투영한, 이른바 ‘창작의 자율성’을 즐긴 것이다. 따라서 내포의 중고제 소리는 한마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알다시피, 내포 출신 중고제 전통가무악의 명인들은 20세기 초반 중앙무대를 쥐락펴락하며 전통공연예술계를 주도했다. 아쉽게도 오늘날 중고제 소리의 전승 맥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편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중고제 소리꾼 대부분이 윤색과 개작, 변용과 재창조로서 늘 새로움(新)을 추구하여 고정된 본(本)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