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책, 마음의 길 내기7.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기행산문집/ ㈜실천문학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책, 마음의 길 내기7.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기행산문집/ ㈜실천문학
  • 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 승인 2022.11.0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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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아트스페이스U대표, 설치도예가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계절이다. 한잔의 따스한 차는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보고 싶게 만든다. 찬바람이 부니 숱하게 잃어버린 물건들과 이름들이 아쉬워진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다 버리고 뒤늦게 슬퍼하는지. 2022년 10월 서울 한복판, 우리 모두는 꽃같은 여럿을 잃어 버렸다. 엄청난 재앙을 마주하며 젊은이들이 이런 식으로 이별을 배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운한 사고로 슬프게 포장되는 것도 옳지 않다. 인재였다. 이태원 대참사로 사라져버린 어린 영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얼굴도 모르는 그대가 진심으로 그리워진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책은 박완서님의 산문집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스튜디오카페 루시다에 들렀다가 ‘잃어버린 가방’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잔의 커피는 책을 들게 만드는 힘이 있고 사색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박완서님은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당선된 <나목>을 시작으로 <휘청거리는 여자>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수많은 장편소설을 통해 독자를 만나고 있지만 개인의 일상이 드러나는 산문집은 만나기 쉽지 않기에 궁금함으로 책을 폈다. 박완서작가의 여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총 4개의 장으로 국내 오대산, 섬진강을 시작으로 바티칸, 백두산 상해, 에티오피아,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쉽게 갈수 없는 여행지의 정서를 잘 모아놓은 책이다. 그간 발표된 장편소설과 달리 박완서 작가만의 필체로 진솔하게 전달된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박완서작가의 에티오피아 방문기중 일부분이다. 먼 나라에 대한 아득한 신비감은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는 불편도 마다하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소말리아 접경 난민촌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땅위로 잡초도 보이지 않는다. 쾌청한 날씨는 몇 년째 계속된 한발과 가뭄의 현장과 대비가 되어 두려운 마음마저 들게 만든다. 땅의 숨결이란 무엇인가? 나무와 풀과 푸성귀의 씨앗을 품고 싹트게 하고 밀어 올리는 거대한 에너지가 아닌가? 숨 쉬지 않는 땅, 충분한 비가 내리면 땅이 살아날까? 숨 쉬지 않는다는 것은 물과 영양분의 저장능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곳의 황폐화는 천재가 아닌 내전과 군사독재를 인한 농업정책이나 산림정책이 전무한 사이에 목재나 땔감으로 삼림을 남벌한 인재 쪽에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 평 남짓한 흙바닥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아이들은 피골이 상접했다. 영양상태가 나쁜데 반해 수려한 두상과 깊고 맑은 큰 눈과 조밀하고 아름다운 쌍꺼풀은 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시바 여왕의 미모를 면면히 잇고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미소였다,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그들은 구걸이나 읍소를 하지 않고 어른도 아이들도 천사처럼 티 없이 웃는다. 어찌 그 지경에서 웃을 수가 있는지. 숨 쉬지 않는 땅, 에티오피아의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박완서작가의 눈으로 본 에티오피아는 삶이 계속되는 곳이며 영원히 숨쉬는 땅이다.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매년 1월이면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는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에 부친다고 한다. 내용물을 모르니 무한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대단한 귀중품이 들어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단다. 일단 낙찰이 되고 나면 관중들에게 즉시 공개가 되는데 산뜻한 여행용품이라면 모를까? 더러운 속옷이나 양말이 꾸역꾸역 들어 있다면 낙찰자나 구경꾼이나 모두 큰소리로 웃거나 하하 깔깔 즐거워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당신은 여행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여행 가방의 겉모습만 보고 꽤 괜찮은 게 들어있다고 생각할 터인데 경매에 부친 대단한 가방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개봉을 하게 된다면 마치 죽은 짐숭의 내장처럼 나쁜 냄새를 풍기며 짐이 터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할 것은 육신이라는 여행가방 안에 깃들였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 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그 순간이 아닐까?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금지되었던 여행이 슬금슬금 풀리고 있다. 필자도 이달 말 유럽여행을 계회가고 있었으나 사회적인 정서에 동참하고자 모든 축제를 보류하게 되었다.

156개의 별에게 깊은 애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