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청계천 기행
[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청계천 기행
  • 황현탁 작가
  • 승인 2022.11.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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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을 흐르게 한 혈세투입의 현장
▲황현탁 작가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데 반해, 청계천은 도성 가운데를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원래 청계천은 한양도성 사방의 산(백악, 낙산, 인왕, 목멱)에서 내려오던 개울물이 흐르던 자연하천이었는데, 생활용수를 공급하거나 하수를 처리하는 생활하천이었다. 비가 와 바닥에 토사가 쌓이거나 범람하기도 하자, 개거도감·준천사와 같은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바닥을 파고 물길을 넓히거나 축대를 쌓고 버드나무를 심어, 자연하천을 인공하천인 개천(開川, 淸溪川)으로 바꿔놓았다.

일제강점기,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생활하수가 늘어나 지천 복개가 시작되고, 1977년에는 전부 복개되어 청계천이 청계로가 된다. 1980년대 중반까지 청계로 위에는 청계, 삼일고가도로가 완공되며, 복개도로 좌우에는 상가와 공장이 들어서 한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못 만드는 것이 없고, 못 구하는 것이 없는 청계천 신화의 현장’이 된 것이다.

21세기 들어서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욕구가 분출되고,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이 쟁점이 된다. ‘즉시 복원’을 주장하던 후보자의 당선으로 그해 7월부터 복원계획이 수립되어 2005년 10월 5.84km에 이르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마무리된다. 시멘트콘크리트로 덮였던 청계천이 다시 지상으로 나와 한강물을 끌어들여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인 청계천(淸溪川)’이 된 것이다.

▲인공폭포와 클래스 올덴버그 코샤반 부르군의 알루미늄 작품 스프링
▲인공폭포와 클래스 올덴버그 코샤반 부르군의 알루미늄 작품 스프링 (사진=황현탁 제공)

지금은 복원 후 20여년이 지나 청계천 복개도로와 그 위 고가도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으며, 청계천변에 다닥다닥 들어섰던 ‘판잣집들’은 대다수 시민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판자촌 사람들은 갔고, 고가도로 세대들도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 서울에 터전을 잡았던 나도 고가도로 밑 청계로 양옆에 가게들이 밀집해 있었고, 택시를 타고 4~5층 높이의 고가도로를 신호등 없이 시원스레 달렸던 기억밖에 없다.

▲오간수문 모형 (사진=황현탁 제공)

청계천의 오늘을 살펴보기 위해 따끈한 여름날 오전, 스위스 목동들의 전통악기인 ‘알프호른’(Alphorn)을 바로 새워둔 것과 비슷한 모양의 클래스 올덴버그 & 코샤반 부르군의 <스프링>이란 작품이 설치된 청계광장을 들어서 청계천으로 내려섰다. 뒤를 돌아보니 높지 않은 인공폭포가 흘러내려 기분을 서늘하게 한다. 개천 곳곳에는 징검다리를 놓아 물길을 살펴보거나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가니 청계천에 있었던 24개 다리 중 첫 번째 다리인 ‘모전교’가 나타난다. 교통흐름의 편의를 위해 폭과 길이는 넓히거나 늘리고, 재질도 콘크리트, 돌, 나무로 특색을 살려 다양한 모양의 새로운 다리를 가설하였다. 효경교, 하량교 등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다리가 있던 곳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동판을 산책로에 묻어 두었다.

▲정조대왕능행반차도.가운데 좌마가 왕이 타는 말
▲정조대왕능행반차도.가운데 좌마가 왕이 타는 말 (사진=황현탁 제공)

‘수표교’(길이 27.5m, 폭 7.5m, 최대높이 4m)처럼 보존 가치가 있는 다리는 장춘단공원 한 쪽에 옮겨놓았다.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하던, 보물로 지정된 ‘수표’(水標)는 다시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고, 복제품 수표는 청계천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대문(흥인지문)인근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던 청계천에는 다섯 칸의 수문으로 된 오간수문(五間水門)과 두 칸의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는데, 오간수문은 당초 위치의 하류지점 북측 벽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고, 이간수문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옛 성곽자리 아래에 복원, 전시하고 있다.

▲고가도로 교각 (사진=황현탁 제공)

청계천에서 만날 수 있는 과거 흔적으로는 청계천박물관 앞에 새로 지어 놓은 판자촌 모형 몇 채와, 성북천과 만나는 지점에 남겨둔 고가도로 교각 3개가 있다. 판자촌은 코로나19로 개방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사진에서 봤던 판잣집보다 깨끗하고 정돈되어 당시의 생활상과는 딴 판으로 느껴졌다. 뻘쭘하게 외따로 서있는 고가도로 교각만이 청계천 위에 도로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청계로 연변 조그만 가게에서 ‘사장’소리 들어가며, 내일을 위해 불철주야 분주했던 ‘치열한 삶의 현장’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청계천 양쪽 호안에 붙여놓거나 청계천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흑백 사진들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청혼의 벽  (사진=황현탁 제공)

청계천에는 곳곳에 볼거리를 새로 만들어 놓았다. 광교하류 ‘디지털가든’에는 저녁시간에 조명을 이용한 디지털 꽃을 만날 수 있으며,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참배하는 모습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바탕으로 한 <정조대왕능행반차도>를 북측 벽에 타일로 재현해 놓았다.(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도 이육사의 시, 벽화, 설치미술작품, 2만여 명의 소망을 적은 타일이 부착된 ‘소망의 벽’, 선남선녀들을 위한 ‘청혼의 벽’도 설치되어 있다.

▲세종대왕기념관내 수표,보물 (사진=황현탁 제공)

일제강점기까지 빨래터였으며, 광복과 6.25전쟁 후 세워진 수많은 판잣집으로 인해 온갖 하수로 시궁창이 되었던 청계천이, 복원 후에는 물고기가 서식하고 백로가 날아들 정도로 수질이 개선되었다. 청계천 밑바닥 대부분은 정비되어 빗물이나 홍수에도 흙탕물이 되지 않으나, 황학동 아래쪽 일부 구간은 맨 흙바닥을 그대로 살려두어 호우가 지나고 난 뒤 들렀을 때에는 모래가 보일 정도였고, 개울에는 잉어가 물살을 즐기고 있었다.

▲장춘단공원의 수표교
▲장춘단공원의 수표교 (사진=황현탁 제공)

토사가 쌓이거나 웅덩이가 생기는 자연하천을, 산책로와 즐길 거리를 만들어 정갈하게 정비해 놓은 것이다. 그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물고기를 관찰하며, 시민들이 산책이나 조깅, 데이트를 즐기는 ‘휴식’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감사한다. 수 조원의 세금이 투입되었겠지만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음은 복원사업이 성공했음을 웅변하고 있다. 혈세는 그런 식으로 쓰여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