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명무 이매방의 초기 제자 삼인방
[성기숙의 문화읽기]명무 이매방의 초기 제자 삼인방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11.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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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박은하, 김춘호 회고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호남춤의 명인 우봉(宇峰) 이매방(李梅芳 1927~2015)은 일찍이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 불렸다. 생전의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명성이 높았다. 국가무형문화재의 두 종목에서 예능보유자 타이틀을 거머쥔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에 속한다. 그가 배출한 이수자만도 수백 명에 달한다. 명실상부 전통춤계의 ‘금자탑’임을 웅변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작금에 이르러 금자탑에 균열의 징후가 엿보인다. 엄밀하게는 지난 2015년 이매방 타계와 더불어 균열은 이미 예고됐었다고 보여진다. 이매방 친족과 제자들 사이에 초래된 저작권 논쟁은 파장이 적지 않았다. 특히 2019년 아홉 명에 달하는 전통춤꾼이 일시에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르면서 변화의 조짐은 더욱 가파르게 질주해가는 듯 싶다. 

무엇보다 이수자들의 활동이 왕성해졌다. 알다시피, 이수자는 무형문화재 전승체계 중 예능보유자, 전승교육사 다음 단계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근래 들어 이수자들의 전통춤 공연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수자 이외 이매방의 후속 세대 역시 이에 편승하여 무대에 서고 있다. 이른바 ‘전통춤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형문화재 지정 이전과 이후로 이매방의 제자는 그 층위를 달리한다. 짐작컨대, 무형문화재 지정 이전의 제자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스승의 춤 법도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잇고자 하는 순수한 소망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다. 이들의 존재는 훗날 이매방 춤에 담지된 원형성의 기원과 변이과정을 탐문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 즈음에 명무 이매방의 초기 제자 삼인방을 회고한다. 이매방이 부산에 머물 때 입문한 동래한량무의 명인 김진홍(金鎭洪)을 비롯 예향 광주에서 일평생 스승의 춤을 전승한 박은하(朴垠河), 그리고 서울 신림동에서 이매방의 춤 맥을 이은 김춘호(金春湖)가 바로 그들이다. 

이매방의 초기 세자 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재직 시절 전국의 전통무용가를 대상으로 “입춤·한량무·검무”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고,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세 분의 춤꾼과 조우했다. 

3년간의 전국조사 이후 『입춤 한량무 검무』 조사보고서가 출간되었고 예술성과 학술성, 민속적 가치 등을 검토하여 무보화 작업을 추진했다. 한량무의 경우, 지역 고유의 향토색이 짙게 투영된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이 낙점되어 『舞譜集』(국립문화재연구소, 1996)으로 발간되었다. 이후 동래한량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김진홍은 이 춤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우봉의 초기 제자 삼인방, 김진홍·박은하·김춘호
- 이매방 춤의 원형성 탐문의 길잡이

이매방의 초기 제자인 김진홍은 우리시대 전통춤의 명인으로 손색이 없다. 193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메이지유신의 소산인 신문명·신문화가 꽃피었던 오사카의 도시문화 속에서 전개된 오페라, 영화, 연극, 무용 등 서구식 극장문법에 토대한 여러 예술장르를 접한다. 이렇듯 유년시절의 풍부한 예술체험은 훗날 김진홍의 예술세계가 무르익는데 귀중한 자양분이 됐다.

그는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부산 범일동에 안착했다. 주지하듯,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은 전국의 피난처가 되었다. 김진홍은 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타이프라이터로 일하며 견디었다. 한편 피아노를 배워 연주활동을 병행하면서 차츰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우연한 기회에 범일동 삼일극장에서 개최된 민속춤경연대회에 ‘남방춤’으로 참가하여 입상하는 행운을 누린다. 

김진홍의 인생은 호남춤의 명인 이매방을 만나면서 큰 변곡점을 맞는다. 6.26때 부산에 집결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종식되자 대부분 상경하거나 또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부의 사람들은 그대로 부산에 눌러앉아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다. 이매방은 후자에 속했다. 김진홍 역시 부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매방은 부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열고 제자양성에 주력했다. 이때 김진홍은 이매방과 사승관계를 맺고 그의 문하에서 전통춤을 사사받는다. 이매방과의 만남은 그의 춤을 한층 견고하게 다지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한편으론 동래야류의 예능보유자 문장원 문하에서 덧뵈기춤과 한량무를 배웠다. 동래지역을 대표하는 민속예능을 접하면서 김진홍의 춤 실력은 한층 무르익는다. 

뿐만 아니라 동해안별신굿의 무속 명인 김계향에게 굿춤도 배웠다. 교방춤의 권위자인 진주의 김수악을 비롯 창원의 김애정 문하에서 승무, 살풀이춤 등 교방계열의 전통춤을 체득하였다. 이렇듯 김진홍은 영남지역의 다양한 민속예능을 접하면서 예술적 스펙트럼이 한층 확장되는 계기를 맞는다. 

두 번째 이매방의 초기 제자로 박은하를 떠올린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의 눈에 띄어 무용을 처음 시작했다. 이후 광주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던 이매방 문하에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춤을 배웠다. 당시 이매방은 광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쳤는데, 박은하는 이곳에도 등록하여 이매방 춤을 체득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가 배운 이매방류 전통춤은 굿거리춤을 비롯 살출이춤, 승무, 검무, 장고무, 한량무 등 실로 다채롭다.

청운의 꿈을 안고 전문춤꾼이 되고자 상경하여 서라벌예대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하차했다. 집안의 반대가 극심하여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스승 이매방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상경하자 그도 역시 서울로 따라와 활동하다가 광주로 회향했다. 20대 후반 광주에 박은하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제자 키우는데 전념한다. 그는 우봉 이매방의 고향에서 일평생 스승의 춤 맥을 지켜온 진정한 의미의 ‘우봉 춤 지킴이’라 할 수 있다.  

호남춤의 명인 이매방의 초기 제자 삼인방 중 마지막으로 거론할 인물은 바로 김춘호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춘호는 9세 때 동포들을 따라 배편으로 귀국하여 부산애린원에서 성장했다. 이 시절 국악명인 박성옥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성옥은 부산애린원 식당을 빌려 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남다른 감성과 신체를 지닌 김춘호를 발탁하여 춤을 추게 한 것이 인연의 발단이 됐다. 

한편, 박성옥은 신무용가 최승희의 무용반주를 맡았던 국악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무용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박성옥에게 춤의 기본기를 체득한 김춘호는 이매방을 만나면서 춤실력이 일취월장한다. 10대 후반에 부산에서 개최된 이매방의 공연을 보고 단숨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스승 이매방이 상경하자 그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스승 곁에 머물며 춤을 사사받는 등 끈기와 진념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김춘호의 이매방무용연구소 생활은 단지 춤학습에만 머물지 않았다. 춤을 배우는 한편 스승 이매방이 수업을 할 때 곁에서 장단을 쳐 주거나 스승의 부재 중엔 연구생을 지도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사실상 조교와 다름없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매방은 승무(제27호), 살풀이춤(제97호)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최고의 명무 반열에 올랐다. 자연히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스승 이매방의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제자 김춘호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위축됐음은 실로 아이로니컬하다. 

오늘날 김춘호의 예맥은 제자 오철주가 잇고 있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김춘호의 춤은 꾸밈이 없는 호방함과 더불어 남성적 역동성이 짙다. 이에 반해 제자 오철주는 섬세하고 정교한 움직임과 밀도있는 정중동(靜中動) 미학을 구현하는 등 나름의 독창성이 투영되어 있다. 물론 춤사위 마디 마디에 이매방-김춘호로 이어지는 고유의 춤매소드가 면면히 흐르고 있음은 불문가지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