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가와 신체 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예술가와 신체 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2.11.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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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사이버 보디 아티스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스텔락에게 더 큰 유영세를 안긴 것은 제3의 손이라고 부르는 불수의근 신체(involuntary body)이다. 그는 전선이 얼기설기 엉킨 인공 로봇 팔을 몸에 부착하고 퍼포먼스를 벌인다.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에 참가차 서울에 온 그는 선재아트센터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 제3의 손을 몸에 장착하고 시연을 했다.

스텔락의 사이버네틱 보디 아트는 마치 스타트랙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악당의 형상을 한 작가가 확장된 신체를 일그러뜨리며, 방사능 측정기의 일종인 가이거 계기판과 단파 라디오의 소음이 만드는 아수라장과도 같은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스텔락의 보디 아트 퍼포먼스는 때로 인터넷 시스템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공을 초월하는 사이버 예술의 표본을 보여준다.

나의 기억에 2014년은 무척 바빴던 한 해로 남아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총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총회와 콩그레스를 진행하느라 분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때 맞춰 평창동의 세줄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진 올랑과 나는 만나기만 하면 선글라스 바꿔쓰기 퍼포먼스를 비공식적으로 했다. 그게 서너 차례는 된다. 세줄갤러리에는 올랑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증강현실 기법을 이용한 작품이었다. 전시실의 벽면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 비해 벽면에 투사된 올랑의 이미지는 가상이었다. 나는 나의 몸에 안기듯이 기우는 올랑의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안았는데, 물론 물질감이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비현실적이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뚜렷한 현실감 때문에 전율을 느꼈던 생각이 난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에 영향을 미친다. 카메라의 발명은 회화의 기능을 대신했으며, 영화는 현실을 영화관으로 가져왔다. 쟝 팅겔리는 움직이는 기계가 연속적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특수한 장치를 고안해 냈다. 내가 어렸을 적 작은 아버지는 달걀귀신 이야기를 자주 해서 캄캄한 밤중에 상여집 앞을 지나칠 때면, 흰 달걀이 내 앞에 굴러다니는 착각때문에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좀 더 커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하루는 앞집의 뜰에 있는 복숭아를 따먹기 위해 캄캄한 밤중에 담장에 올라갔는데, 그 집의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쪼그려 앉는 모습을 담너머로 보고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그 모습이 허깨비였는지 실제였는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궁금하다.

이러한 정신 현상은 예술과 환영의 문제와 관계가 깊다. 기술의 진보에 따른 가상과 실제, 이른바 버츄얼 리얼리티(VR)와 리얼리티의 관계는 허깨비와 실제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듯이, 담 너머에서 갑자기 나를 보자 쪼그려 앉은 이웃집 할아버지는 복숭아 서리를 하는 나의 죄의식이 불러낸 환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가상현실이 됐든 증강현실이 됐든,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NFT나 메타버스(Metaverse)가 됐든지 간에, 미디어로서 예술가와 신체의 관계는 화가나 조각가의 경우처럼 예술적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대리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가 주제가 되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즉, 이는 다시 말해서 예술을 위해 예술가가 자신의 신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예술을 위해 스스로 존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텔락의 불수의근, 올랑의 성형수술은 그런 의미에서 자족적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경호의 정처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는 내가 어렸을 적 상상한 달걀귀신이나 담너머에서 쪼그려 앉던 이웃집 할아버지의 펄럭이는 흰옷과도 같다. 이경호가 손에 든 카메라와 허공 높이 치솟은 드론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비닐 봉지는 정처없이 지상을 떠다니는 영혼의 한 유비(analogy)이다. 그것은 한편의 시이기도 하고 피폐해서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는 버림받은 영혼이 마지막으로 흔드는 흰 손수건일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김석환은 자신의 얼굴을 노끈으로 칭칭 감거나 날고기를 씹어먹는 행위를 통해 신체의 직접성을 추구해왔다. 제의에 뿌리를 둔 그의 행위는 신체 자체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글의 주제에 부합한다. 김석환의 퍼포먼스는 제의적 측면에서 오스트리아의 행위예술가 헤르만 니취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헤르만 니취가 목표로 삼는 사회정화, 즉 고통과 대속을 통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단 니취의 행위가 디오니소스 축제를 비롯하여 십자가 책형, 양의 도살 등 기독교에 뿌리박은 서양의 오랜 문화적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반면, 김석환은 개인적인 발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장내에 들어서면서 호각을 부는 것으로 행위를 시작하는 심홍재의 퍼포먼스는 동양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주역의 12간지가 중요한 개념의 설정이다. 그는 12개의 서로 마주 보는 흰 종이에 먹을 듬뿍 머금은 큰 붓으로 12간지를 한자로 쓴다. 여기서 행위자의 신체는 의미의 전달자로 작용한다.

품바 스타일로 유명한 성능경 퍼포먼스의 핵심은 관객과의 소통이다. '소통의 불통'을 주장하는 그는 그러면서도 불통의 벽을 깨기 위해 일상에서 채집한 경구가 적힌 탁구공을 관객을 겨냥해 새총으로 쏜다. 간간히 터지는 촌철살인의 유머는 성능경의 퍼포먼스에 기름을 친다.

문재선 역시 소통을 중시하는 퍼포머다. 통신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장비를 등에 짊어진 채 안테나 같이 생긴 가늘고 긴 금속 막대를 양손에 든 문재선의 모습은 한 마리의 검은 파리를 연상시킨다.

성백은 천으로 된 긴꼬리가 달린 공 모양의 물체를 십여 미터 앞에 세워진 철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던지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둥근 물체에는 검정 혹은 붉은 색이 뭍혀 있어 철판에 부딪힐 때 마다 요란한 굉음이 터진다. 대중의 의식을 깨우는 소리다. 이쯤에서 다시 퍼포먼스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오늘날 퍼포먼스는 선사시대의 동굴생활을 동경한다. 몸의 외침은 벌거벗은 인간으로의 원초적 회귀 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미분화된 사회, 그리하여 사회의 전체상을 살펴보기 어려워진 이 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이다. 오늘날 웹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쪽방들(cells)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거대한 퍼포먼스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사회적 관계망은 근대 이전(pre-modern)으로의 회귀 의식을 주재하는 원환 운동의 도구인 것이다. 모더니티의 선형적 진행에서 리좀적 가지뻗기로의 선회, 이 어찌 축복이 아닌가."(필자, 앞의 책 뒷날개에서 인용)

나는 지금 광활한 몽골의 초원에 서 있다. 몽골의 초원은 바람만이 역사를 쓰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양을 비롯한 가축이 죽어 썩으면 독수리나 들짐승이 먹는다. 초식동물인 소나 말, 양의 똥은 초원 위에서 삭고, 죽은 동물의 뼈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몽골에는 매장 풍습이 없다. 몽골의 자연미술가 바다(Batsaikhan.S)는 이십 오년 전만해도 사람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가다 뭔가에 부딪혀 떨어지면 그대로 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연의 순환이 아닌가. 드넓은 초원 위에 널린 흰 동물의 뼈들과 똥들. 천신을 믿는 몽골인들은 하늘을 향해 예를 올린다. 텡그리(Tengri) 신앙의 산물이다.

나는 몽골의 자연미술가 그룹이 주최한 [Mongolian Nomad Project 2022]에 참가차 이곳에 왔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물질의 풍요,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잠시 무소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초원의 저 너머에 보이는 작은 초막을 바라보며, 예술가의 신체가 욕망의 다른 이름은 아닌지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