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진주의암별제 복원 30년의 의미
[성기숙의 문화읽기]진주의암별제 복원 30년의 의미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12.1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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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30여 년 전의 일이다. 1992년 10월 4일(음력 9월 9일 중양일)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된 의암별제(義菴別祭)를 참관했다. 엄밀히 말해 출장으로 찾은 행사였다. 그해 2월 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에 몸담았다. 진주의암별제 참관은 현지조사 성격을 띤 첫 지방 출장이었다. 긴장과 설램이 교차한 첫 현지조사 결과는 학술논문으로 발표됐다. 작금에 이르러서도 의암별제에 대한 머릿속 또렷한 기억은 이와 무관치 않다. 

진주 남강변에 자리한 촉석루에서 펼쳐진 의암별제는 진귀한 풍경을 연출했다. 제례 전 촉석루에 차려진 제물은 다채로웠다. 떡, 밥, 국수, 적, 탕, 간, 수박, 포, 식혜 등 제물이 각각의 위치에 진설되어 정갈함을 더한다. 제상 뒤편으로 의기논개지위(義妓論介之位)라는 신위가 놓여졌고, 제사 상차림 이외 여유 공간은 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였다.

의암별제는 여타의 제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본격적인 제례가 진행되기에 앞서 촉석루 뒤편 의기사(義妓祠)에 모셔져 있는 신위를 봉송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집례 두 명이 신위를 봉송하여 촉석루에 이르면 조촉이 제단으로 인도하여 교의에 안착시킨다. 헌관을 비롯 여러 제관은 예복을 갖춰입고 제단 앞에 대기하고 서 있다. 신위 봉송이 끝나면 배열해 있던 제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례를 진행된다. 

일반 제례와 달리 의암별제는 악가무(樂歌舞)가 곁들여진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영신례, 상향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사신례 등 제례 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춤과 노래, 연주가 병행된다. 단연 무원에게 시선이 멈춘다. 4x6열로 총 24명의 무원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무원들은 옅은 분홍색 치마, 연두색 당의를 착용하고 두 손엔 색동 한삼을 착용했다. 곱게 빚어 비녀를 꽂고 첩지로 장식한 머리는 정갈하고 단정하다.  

의암별제는 춤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영신례, 상향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등에서 춤이 추어진다. 춤사위는 지극히 단조롭고 정적이며 또한 반복적이다. 절제된 움직임은 엄숙함과 경건함을 더한다. 절차에 따른 엄격한 법식의 준수는 여타의 제례의식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주목할 것은, 제례가 끝난 후 반전의 묘미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바로 여흥가무다. 진주검무를 비롯 살풀이춤, 판소리 등이 펼쳐졌다. 진주검무가 4검무 형식으로 추어졌고, 궁중정재의 권위자 김영숙이 한영숙류 살풀이춤을 선보였다. 판소리에 이어 제례에 참여한 제관, 악공, 무원 그리고 관람자들이 한데 어울려 흥과 신명의 난장으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한말에 거행된 의암별제의 여흥가무 프로그램은 더욱 다채로웠다. 아박무, 향발무, 황창무, 처용가무, 승무를 비롯 창가, 잡요, 단가, 잡희, 사당패놀이, 꼭두각시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통악가무를 비롯 민속연희가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새삼 예향 진주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주지하듯, 진주는 옛부터 교방문화가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진주에는 고려 말엽부터 관기(官妓) 있었으며, 조선 말까지 교방을 매개로 존재하다가 한일합방 이후 궁중여악의 폐지와 더불어 진주교방도 자취를 감추었다. 교방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기생조합 내지 권번으로 그 바통이 이어졌다. 

논개의 충절 기린 유교식 제례 
성계옥·김영숙의 열정과 집념의 소산

일제강점기 진주권번은 한마디로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로 손색이 없다. 오늘날 진주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를 비롯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진주한량무(제3호), 진주포구락무(제12호), 교방굿거리춤(제21호) 등은 바로 교방-권번을 매개로 전승된 대표적인 무형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의암별제 역시 이러한 전승 맥락과 궤를 같이한다. 의암별제는 고종 5년(1868)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 1817~1899)에 의해 창설되었다. 1867년 진주목사로 부임한 정현석은 경상우병사와 논의하여 논개를 추모하는 의기사를 중건했다. 더불어 춘추상제와 별도로 6월 중 길일(吉日)을 택하여 제향토록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의 시초가 된다. 매년 거행되던 의암별제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중단되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순의제(殉義祭)와 합동으로 치러졌다. 이후 단절기를 거친 의암별제는 1992년 진주검무의 명인 운창(芸窓) 성계옥(成季玉, 1927~2009)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알다시피, 성계옥은 진주지역 전통춤 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적지 않다.(성기숙, “『교방가요』와 운창 성계옥”(서울문화투데이, 2020년 11월 19일자 참조). 한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교방가요(敎坊歌謠)』를 토대로 조선시대 진주교방에서 전습된 여러 춤을 복원 재현했다. 1872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저술한 『교방가요』는 조선후기 진주교방에서 전습된 악가무를 기록한 희귀본으로 공연예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교방가요』에는 육화대, 연화대, 헌반도, 고무, 포구락, 검무, 선악, 항장무, 아박무, 황창무, 처용가무, 승무, 의암별제가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춤에 대한 악부시체의 한역시와 더불어 연행모습을 담은 채색화가 그려져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성계옥은 『교방가요』를 토대로 진주한량무, 진주포구락무, 진주선악(선유락), 의암별제 등을 발굴, 복원하는 성과를 남겼다.   

알다시피, 의암별제 복원에 사용된 전거(典據)는 『교방가요』이다. 이 문헌에는 의암별제의 의례절차를 비롯 가자(歌者), 무자(舞者), 악공(樂工)의 숫자 및 영신, 초헌, 아헌, 종헌에서 부르는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채색화가 곁들여 있어 의암별제 복원에 긴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계옥은 의암별제 복원에서 『교방가요』의 기록과 더불어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최초 보유자인 진주교방 출신 최순이의 구전을 참조했다. 특히 1992년 의암별제 복원 작업에는 당대 궁중제례 및 궁중악무의 최고 권위자들의 식견이 큰 보탬이 되었다. 예컨대 김기수가 제례악보를 맡고, 김천흥이 제례무를 고증했으며, 성경린이 제례홀기를 해제했다.

이렇듯 의암별제의 복원은 『교방가요』라는 문헌기록과 조선시대 궁중악무의 전통을 이은 김천흥, 성경린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사사한 김영숙이 참여함으로써 신뢰를 더한다. 궁중정재 및 일무의 최고 전문가인 김영숙은 『교방가요』의 기록을 토대로 진주포구락무, 진주선악 등을 복원하는 등 진주 전통춤의 보전 전승에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다. 

올해는 의암별제가 복원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의암별제는 1992년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이하여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기리고자 복원되었다. 기생들이 제관을 맡고 유교식 제례의식에 악가무가 병행된 의암별제는 진주의 무형유산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성계옥, 김영숙의 열정과 집념의 소산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년 전 의암별제 복원의 현장을 반추하면서 새삼 그 의미를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