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창무회 46년 기념 공연, ‘모시나비’의 상징성
[이근수의 무용평론]창무회 46년 기념 공연, ‘모시나비’의 상징성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2.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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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소재와 새로운 형식 모듈형안무법에 거는 기대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모시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흰색 실로 연결된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를 올려다보고 있다. 또 한 사람, 그는 좌우로 길게 늘어진 붉은 색 끈을 들고 무대 한가운데 서 있다. 안과 밖을 나누고 삶과 죽음을 가르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경계선이다. 무대 좌우에서 여섯 명 무용수가 등장한다. 흰 옷차림이 모시나비의 희고 투명한 날개를 닮았다. 그들이 무대 중앙에 깔린 녹색 4각형의 주변을 돈다. 함께 달리고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는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그들 사이에 인연이 형성되고 이제 흰색으로 진화한 바닥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그들의 삶도 각색으로 분화한다. (김지영, 터무늬)

공중에 매달린 두 개의 네모난 창틀을 통해 교교한 달빛이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흰색 끈으로 연결된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인연의 실로 묶인 이들은 모시나비 일생일대의 사랑을 준비한다. 암컷이 8자 모양으로 무대 주위를 빙빙 돌며 수컷을 유혹하고 수컷은 투명한 날개를 팔랑이며 암컷 몸 뒤로 날아오른다. 모시나비는 일생에 단 한 번 교미(交尾)한다. 교미를 마친 수컷은 사랑이 끝나는 순간 암컷의 생식기에 정조대를 채우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수태낭(受胎囊)이 채워진 암컷은 다른 수컷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알을 낳은 암컷 역시 삶을 마친다. 곤충 세계에서 밝혀진 전형적인 일부일처제의 성 생태계 모습이다. 침묵 속에 길게 이루어지는 김미선과 박준형 듀엣이 부드러운 달빛 조명 아래 감각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김미선, 나비)

알에서 깨어난 네 마리 나비가 다시 날갯짓을 시작한다. 그들의 몸체 역시 끈으로 이어져 있고 네 줄의 굵은 실로 경계 지어진 피라미드 모양의 공간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불협화음을 낳고 북소리, 장구 소리, 꽹과리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고 불평등하지만, 모시나비의 날개에 새겨진 선명한 무늬는 좌우 대칭적이다. 투명한 흰 날개를 팔락이며 나비는 균형을 찾아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김성의, 안팎)

모시나비의 일생은 세상사를 닮았다. 곳곳에 암초가 있고 여기저기 불현듯 나타나는 장애물이 그들의 날갯짓을 방해한다. 11명 무용수가 모두 등장하고 창무(創舞) 특유의 군무가 펼쳐진다.  절벽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투명성을 지키며 혼자 서기 위한 무용수들의 마지막 무대는 애처롭고 절실하다, 움직임이 격해지면서 그들을 옥죄던 실들이 끊어진다. 모두가 바닥에 누워 하늘로 들어 올린 두 발을 흔들며 무언가를 간구하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조명과 우울한 음악이 갈래갈래 찢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 한 사람씩 차례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벗어 던진 옷들이 무대에 수북이 쌓였다. 무대 앞에 붉은 색실을 길게 늘이고 있는 한 사람, 그가 만드는 경계도 이제 힘을 잃었다. 무대가 주는 쓸쓸함이 창무회를 아끼는 관객의 마음 역시 아프게 한 피날레였다. (최지연, 혼탁)

‘모시나비’(12월 7일, 달오름극장)는 창립 46주년을 맞는 창무회(創舞會)의 2022년 정기 공연이다. 무용단을 대표하는 최지연, 김지영, 김미선, 김성의 등 네 명이 각각 안무한 네 작품을 모아 60분 공연을 완성하는 ‘모듈형안무법’이란 형식을 시도했다. 독립된 네 작품을 모아보니 일관된 스토리가 구성된다. 모시나비란 곤충의 생태에 비유하여 창무회의 내력을 담아보고자 한 의도가 있었을까. 단 한 번 짝짓기를 통해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치는 모시나비의 순수성, 안팎의 몸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양 날개의 투명성, 한줄기 실에 묶여 평생을 함께하며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용수들의 질긴 인연과 그들의 경계선에 우뚝 서서 붉은 줄을 힘있게 당기고 있는 절대자의 존재까지 창무회의 과거와 현재를 압축한 듯한 모습이다. 1993년 시작한 ‘창무국제공연예술제’, 1997년 개관한 ‘포스트극장’과 같은 해 창간한 무용전문지 ‘몸’을 아우르며 국내 무용계 유일한 종합플랫폼체제를 구축한 창무예술원이 “전통춤을 기반으로 당대의 살아있는 춤을 창작하겠다“ 당초의 포부에 집중하면서 5월의 모시나비처럼 다시금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