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대동연희 최치원놀이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대동연희 최치원놀이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12.14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월광주와 전통연희의 작위적 연결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과연 ‘최치원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지원이 등장하니 용인되나? 이 작품은 향악잡영(鄕樂雜詠) 속 연희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면 ‘대동세상’으로 향했는가? 최치원은 등장할 뿐이고, 엔딩곡 가사가 ‘대동세상 만만세’다. 대동(大同)은 작품의 실체(實體)가 되지 못했다. 구호처럼 머문다. 2022 민주 인권 평화 가치확산 전통예술공연 <대동연희 최치원놀이>가 안타깝다. (12. 1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무대엔 최치원(정보권), 별소녀(이정인), 할미(김다송), 햄버거를 든 연출가(소장)까지 등장한다. 인물 간의 관계도 성글다. 정극(正劇)으로 볼라치면 주인공이 모호하고, 마당극으로 치면 민중성이 부족하다. ‘최치원이 저러고만 있진 않을 거야’.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비운의 천재 신라 최치원의 향약잡영을 통해 오월광주의 절절한 아픔을 해원하는 대동세상 대동연희극”을 내세웠다. 실제 그러하길 바랐으나, 의도는 용이나 구현은 뱀이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돼버렸다. 작품을 다 보고 ‘최치원 = 민주주의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누굴까? 

주장은 있되, 공감은 없다. 

작가(사성구)와 연출(이왕수)에게 묻고 싶다. ‘오월광주’가 얘기의 중심이긴 한가? 그걸 이렇게 풀어야 했나? 가해와 피해, 억압과 절규의 이분적 논리 속에서, 배우(연희꾼)의 외침에 관객은 지쳐간다. ‘대동연희’로 상생(相生)의 대동세상을 의도했다면 더 안타깝다. 향악잡영의 ‘금환’을 ‘억겁방울’로 받아들인 관객은 몇 명일까? ‘속독’을 ‘오월의 새’로 연결했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리 봐야 하나? 무대는 친절하지 못했고,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주장은 있되, 공감은 없다. 

그래도 다 괜찮을 수 있었다. 연희만 잘 보였으면 말이다. 연출은 무대, 조명, 영상을 잘 살리려는 했던 것일까? 정작 연희꾼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하는 오브제는 더 했다. 드러나야 할 것이 받쳐주는 꼴이 되었다. 연희꾼들은 알까? 무대에서 자신들이 ‘파묻힌’ 존재였다는 걸. 주객전도(主客顚倒)는 이럴 때 써야 한다. 

시종일관 현란한 조명으로 강조된 무대 바닥 위에서, 사자춤의 역동성은 증발해버린다. 검은 사자는 거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다. 그러니 사자가면의 털의 움직임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자극적인 색감은 지워야했다. 모노톤의 담백함 속에서, 우리 연희의 가치를 살려냈어야 했다. 오직 커튼콜에서야 무대에 등장했던 오브제의 정교한 매력을 알게 됐다. 

전통연희에는 연출이 없는 게 아니다. 전통연희에는 연출이 안 보이는 거다. 연희만큼은 인물을 잘 보여줘야 한다. 사람이 보여야 하고, 탈(오브제)을 살려야 한다. 연출을 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연희를 제대로 보였어야 했다. 탈에서 춤까지, 오브제에서 움직임까지. <대동연희 최치원놀이>엔 순간적 ‘시선강탈’은 있되, 지속적 ‘감정이입’으로 이어지질 못했다. 한마디로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동력이 약하다.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연희는 놀이, 연희가 기쁨 

연희(演戲)는 놀이다! 즐거움이 본색이다. 한탄이든, 넋두리든, 다 좋다. 마침내 기쁨과 신명으로 가야 한다. 이 작품도 그랬다고 제작진은 말할 수 있는가? 미칠 것 세상에선, ‘미친 듯이 춤을 추라’ 대사가 반복되는데, 처용이 칼을 들고 나는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이 시대가 놓치고 있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감동적이면서 흥미롭게 관객들에게” 전해주었을까? 제작진의 머리엔 양자의 결합이 존재했지만, 실제 무대에는 잡지 못한 두 마리의 토끼일 뿐이다. 20세기의 비극(悲劇)적 경험을 반추하면서, 연희를 통해서 21세기의 희망적 동력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취약했다. 

앞으로 ‘오월광주’와 연관한 더 이상 절규적 외침만으로는 설득력을 확보하긴 어렵다고 생각된다. ‘오월광주’와 ‘대동연희’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할미와 별소녀가 사자와 함께 아들을 찾기 위해 나서며 무대에 전단을 뿌리는 장면 같은 것으로, 양자를 결합시켰다고 생각하는 건 언어도단(言語道斷)에 자기만족(自己滿足)일 뿐이다. 

보여줄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살려낼 것을 살려내지 못한 <대동연희 최치원놀이>에서 그래도 희망의 빛이 보였는데, 그건 음악이었다. 김문고(음악감독, 기타), 허준혁(대금), 배호영(아쟁), 조봉국(타악)은 관객들을 답답한 심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연희의 돌파구’였다. 그들에 의해서 새롭게 구축되는 에너지가 충만한 연희음악의 신세계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