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귤과 오렌지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귤과 오렌지
  • 윤이현
  • 승인 2022.12.26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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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엄만 미국에 갈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할 거야.”

 

엄마는 언젠가부터 텔레비전 앞에서 두 손에 귤을 꼭 쥐고는 말하곤 했다. 창밖에 눈들이 동네의 골목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입에 넣어준 그 적당한 달콤함과 시큼한 귤의 맛, 그리고 빛나던 그 눈동자를 기억할 수 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동시에 내 발 한가운데 작고 단단한 티눈이 자리 잡은 것이.

엄마는 정말 내가 성인이 되던 해에 짐을 챙겨 미국으로 떠났다. 대학 입시를 망치고 첫사랑 A에게 잔인하게 차인 뒤, 나는 자주 방에 처박혀 귤을 까먹었다. 배가 불러올 즈음엔 세상을 저주하다가 엄마를 생각했다. 왜 하필 캘리포니아였을까. 엄마가 오렌지를 좋아했던가? 그리고 다시 또 A가 떠올라 울다 지쳐 잠자리에 들었다.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티눈 뿌리의 깊이도 깊어져만 갔다. 어김없이 우울함에 빠져 티브이 앞에 앉아 있던 어느 평일 저녁, 제주도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빠였다. 제주도로 놀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1년 만에 전화해서 하는 말이 고작 그런 거였군. 할 것도 없는 무료한 나날. 나는 씁쓸하게 발을 절뚝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1년 만에 마주한 아빠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다소 상기되어 있었고, 어린아이같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어색한 얼굴이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는 사이, 나는 차에 올라탔다. , 그제야 왜 그리도 아빠가 그런 표정들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수석에 한 여자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가구들과 소품들로 따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자는 긴 머리를 살랑이며 집 구석구석을 내게 보여주었다. 웃음이 참 예쁜 여자였다. 하얗고 조금은 통통한 게 우리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정말 수줍고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내년이면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내게 전했다.

함께 저녁을 먹자는 제안에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2층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곤 창문을 열어 바다의 찬 공기를 쐬었다. 물과 물이 만나 부서지는 곳, 그 으스러지는 소리를 먹고 자란 귤들의 고통을 상상했다. 여태 그것들을 달다고 먹어왔다니 마음이 괴로워졌다. , 엄마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운명의 사랑을 찾아내었을까. 바보처럼 길을 잃어서 외국인들에게 돈을 빼앗기지는 않았을까. 붉고 동그란 오렌지들을 먹어보았을까. 왜 이놈의 티눈을 평생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A와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졌다. 동시에 발에서 점점 자라고 있는 이것을 만져보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부엌에 올려진 귤 몇 개와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일찍 돌아올 계획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시간을 당기기로 했다. 이제 두 시간이면 비행 탑승 시간이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귤을 만지작거리다가, 휴대 전화를 열었다.

 

곧 돌아갈게.’

 

엄마의 문자였다.

역시나 A에겐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얼른 와. 보고 싶다.’

 

답장을 보내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발의 통증이 거세졌다.

 

실패구나. 사랑을 찾으러 떠났던 엄마도,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질 못하는 나도,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빠도. 우리 셋은 모두 항상 같은 지점에서 넘어져 왔다. 실패의 구를 도는 작고 연약한 존재들. 그것이 우리 셋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원형은 귤이나 오렌지를 닮았다. 시고 떫고 달고 때로는 싱겁기 그지없는. 단단한 속내 안에 이 오만가지 맛들을 감추고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이 망할 놈의 티눈 때문에 앞으로도 숱하게 넘어지겠지만,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잃어버리고 실패해야 할 것이다. 마음속으로 아빠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고, A를 보내주려 한다. 엄마가 돌아오면 그곳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어주며 함께 끌어안고 기꺼이 울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제주도를 떠나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서울로 떠난다. 아픈 발을 이끌고.

 

사실 쉬는 동안 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합격했다. 위의 글을 시험장에서 쓴 것을 복기한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은사님을 만나 진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대로 해본 것이 있긴 한가.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목표와 방향을 조금이나마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고 지난 4년간 시험을 보고, 낙담하는 과정을 겪어온 내게 한 번 더 용기를 내기가 쉽진 않았다. 2주 동안 주변에 알리지 않고 혼자 준비했다.

시험 당일, 아빠와의 대화를 나누며 고사장으로 향했다. 가장 큰 고민은, 시험장만 가면 평소 기량의 절반도 내지 못하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나의 스타일은 개요도 제목도 없이 느낌 가는 대로 글을 적는 것인데, 그간 시험장에서는 교수님들이 개요를 볼 것을 고려해 글 구상에 시간을 상당히 쏟았었다. 이번만큼은 원 없이 쓰고 싶었기에 기존의 방식을 살려 글을 적기로 했다.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는 순간, 붙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코로나에 걸리는 악재로 지난 일주일을 힘들게 보냈지만, 동시에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열아홉에 꿈꿨던 학교는 아니지만, 방송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나갈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두렵고 감사한 마음이다. 바쁘고 고되었던 일 년이 저물고 새해가 밝아온다. 내가 위에 적었던 구절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비슷한 지점에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방향을 틀어 구덩이를 피해도 보고, 또 다른 길은 없나 여행길에 올라보다 보면 실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낯설고도 설레는 것들을 발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내년도 마냥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겠지만, 귤과 오렌지를 닮은 이 인생이란 쳇바퀴를 또 열심히 뛰고 달리고 넘어져 보려 한다. 그 여정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